이불 한 겹

by 홍이

지쳤다.


마트 계산대에 선 지 아홉 시간.

사람들은 표정 없이 물건을 쌓는다.

무게감 있는 손목,

눅눅한 마스크 안쪽.

퇴근 후엔 또 집안일이다.


일주일에 하루, 쉬는 날엔 시댁에 다녀온다.

몸이 불편한 시어머니를 돌본 지도 꽤 되었다.


남편도, 아이들도, 다들 불평 없이 살아간다.


넉넉치 않은 가정에서 태어난

홍의 아이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

자기 몫을 스스로 해나가며,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불만은 없다.

그러나 홍은 가끔,

삶이 무력하다고 생각한다.

하루가 이틀 같고, 이틀이 삼일 같다.

취미는 없고, 친구도 없다.


그저 가끔, 드라마나 본다.




요즘 홍은 '동백꽃 필 무렵'을 보고 있다.

강하늘, 공효진 주연의 드라마.

용식과 동백,

두 주인공의 알콩달콩한

뻔한 연애 이야기.


하지만 홍에겐 그저 예쁘기만하다.


인생에 다시오지 않을

그 찬란한 순간들이.


나이 오십이 넘어 푼수 같다 한들

어떠한가.


퍽퍽한 하루끝에

젊은이들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홍의 시간들과 대비되어

시리도록 빛나게 다가온다.


나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던가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치니 아홉시.


드라마를 틀었다.

16화


주인공들은 심각하게 울고웃지만

홍이 보기엔 그저 예쁘다.

저렇게 예쁜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는 걸

정작 그들만 모를 뿐이다.


그 찬란한 사랑 드라마 속에

한장면이 문득 눈에 들어온다.


동백이 아파 누워 있었다.

이미 이불을 덥고있는 동백에게

용식은 조용히

이불을 한 겹 더 덮어줬다.

이불사이에 핫팩을 넣고,

흰죽을 끓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홍은 움찔했다.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너무 똑같았다.

꾹 눌러주듯 무거웠던 이불.

하얗고 따듯했던 흰죽.

아무 말 없이, 그렇게.


몸이 먼저 반응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손목으로 눈물을 닦아내면서도,

홍은 드라마 속 장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사랑이었다.




몸살로 앓아누워있던 날,

묵직한 무게감을 느끼며 눈을뜨면

항상 이불이 한 겹 더 덮여 있었다.


보일러는 평소보다 세게 돌아가고

거실로 나가면

밥상위에 흰죽 한 그릇. 간장종지.


너무 오래 보아서, 너무 익숙해서

그저 생활의 배경이 되어버린 그것.


드라마 속에서야 분명한

그 사랑을ㅡ


홍은,

항상 받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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