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씨 영감, 꽃뱀한테 홀려 부렀디야."
마을 어귀에 모인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그 많던 밤나무 밤이며 고추며,
맘껏 가져가라던 홍씨 영감이,
요즘은 눈을 치켜뜨고 사람들을 쫓는단다.
홍씨 영감은 칠십을 훌쩍 넘겼다.
젊어서는 뒷산을 일구어 밤나무를 심었고,
늙어서는 앞마당에 상추며 고추를 길렀다.
허나 세월 앞에 장사가 어디 있겠는가.
이젠 떨어진 밤 하나 주워 담을 힘이 없다.
"어짜피 썩힐 거여. 더 따가."
툭툭 내뱉는 말투 속에,
후한 마음이 있었다.
동네사람들은 밤도 줍고, 고추도 따갔다.
영감은 심심한 날이면 읍내에 나갔다.
시장 골목을 한 바퀴 빙 돌고,
다방 구석에 앉아 쌍화차를 시켜놓고
시간을 죽였다.
그러던 어느날,
다방 구석에 혼자 앉은 할머니. 고운 인상.
"고기 앉아도 되우?"
할머니는 그렇게 다가왔다.
몇 번의 인사 끝에,
둘은 말벗이 되었다.
할머니는 어느새 홍씨 영감의 집에 드나들었다.
노인냄새 밴 이불을 햇볕에 널고
걸레질을 하고, 된장국을 끓였다.
한낮에도 어두컴컴하던 집 안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홍씨 영감의 뒷산에 자주 올랐다.
"밤이 그냥 썩을까봐, 따다 팔아야 쓰겄어."
그렇게 말하고, 밤을 자루에 담았다.
할머니는 다음 날, 시장에 나갔다.
허름한 좌판에 밤을 부려놓고,
"좋은 밤이여! 막 따온 거여~"
한 움큼 돈을 챙긴 할머니는
고등어나 꽁치따위를 사다 구워주었다.
홍씨 영감은 말없이 받아먹었다.
마음 한구석이 헛헛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예전에는 마을 사람들에게
"어짜피 썩을 거여." 하며 따가라 했던 밤이었다.
요즘은 따가려 하면 쏘아보았다.
뒷산의 밤은 이제, 할머니 몫이었다.
할머니는 종종 말했다.
"이것 좀 사야 쓰겄어. 애들한테 보낼 거두."
홍씨 영감은 말없이 지갑을 열었다.
돈이 아깝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이 사람을 곁에 둘 수 있다면 괜찮았다.
하지만 세상은 곱게 봐주지 않았다.
"저 할망구, 홍씨 영감 돈 노리는 거 아녀?
"어젠 뒷산 밤도 팔아 먹었다던데?"
누군가는 걱정스레 말했고, 누군가는 혀를 찼다.
명절,
연중 딱 두 번 내려오는 딸과 아들이 집에 왔다.
"아버지, 저희도 바빠서 자주 못 내려와요."
“저 여자 뭐예요?”
“마을에 이상한 소문 돌아요.”
딸과 아들은 냉랭하게 말했다.
홍씨 영감은 대답하지 않았다.
텅 빈 음식상이 어색하게 놓여 있었다.
그날 밤,
그는 쭈글거리는 피부에,
굽은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한때는 뒷산을 일구던 손.
지금은 밥 한 숟갈 뜨기도 벅찬 손.
형광등은 켜지 않았다.
켜면 눈이 시렸다.
텔레비전 불빛에만 의지해 지냈다.
밖에서는
'전기세 아까워서 저러는가'
'왜 저리 컴컴하게 살아?'
수군거렸지만
누가 알아주겠는가.
늙은 몸의 불편함을.
어두운 방 안.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이 흘러나왔다.
어제도, 그제도 봤던 이들이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그때였다.
탁.
형광등이 환히 켜졌다.
"아자씨, 어두워 죽겠네."
걸레를 든 할머니가 들어섰다.
구수한 된장국 냄새가 함께 밀려왔다.
홍씨 영감은 눈을 가늘게 떴다.
눈부심 속에서도, 웃음이 삐죽 났다.
비록 진짜 사랑은 아닐지라도.
빈 집을 밝히는 이 사람을,
그는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