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Human Library] #8
나는 드라마를 꼬박꼬박 챙겨보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2022년 여름, 우연히 본 한 드라마 예고편에 마음이 끌렸다.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변호사의 이야기. 제목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였다.
그 드라마가 유독 강하게 다가온 건 단순히 설정이 신선해서가 아니었다. 방영이 시작되기도 전, 내 머릿속에는 이미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수년 전 복지관에서 만난 A 씨. 그 역시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분이었다.
A 씨에게는 반복적인 행동이나 거리감이 느껴지는 태도 같은 특징이 있었다. 그러나 그를 설명하는 첫 단어는 따로 있었다. 바로 ‘놀라운 기억력’이었다. 서류 한 장을 통째로 외웠고, 복잡한 숫자 배열도 단번에 이해했다.
나는 그의 비범한 두뇌보다 솔직한 마음이 더 편했다. 어느 날 그는 내 책상 앞에 와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김성수 선생님, OO구 OO동 OO번지에 사시고, 전화번호는 000-0000-0000이죠?”
복지관 서류를 정리하다가 내 정보를 외워버린 것이다. 내가 웃으며 “그걸 다 기억했어요?”라고 묻자, 그는 태연하게 답했다.
“네. 김성수 선생님이 좋아서요.”
그의 ‘좋다’는 말에는 어떤 꾸밈도 없었다. 이성 간의 호감이 아니라, 내가 건넨 작은 간식이나 짧은 인사를 기억해 둔, 가장 순수한 고마움의 표현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종종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은 대학 시절 이야기를 들려준 적도 있다. 수학을 좋아해 수학과에 진학했고, 공부가 무척 즐거웠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는 친구들 때문에 힘들었는데, 대학 친구들은 저를 잘 대해줬어요.”
하고 말하며 살짝 웃던 그의 얼굴이 지금도 또렷하다.
여담으로, A 씨의 수학적 감각은 정말 뛰어났다. 시중에 나와 있는 스도쿠 게임은 너무 시시하다며, 직접 문제를 만들어 풀 정도였으니까.
복지관 직원들은 A 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의 뛰어난 기억력은 서류 정리와 문서철 작업에서 빛을 발했다. 그는 복지관의 ‘숨은 능력자’ 같은 존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체국 계약직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우편물 분류 업무였다. 그가 가진 강점을 잘 살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그곳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지역 신문에 소개될 정도로 두각을 드러냈다.
그에게 특별한 배려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다름’을 ‘틀림’으로 보지 않고, 강점을 알아봐 주는 따뜻한 눈길이면 충분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세상 속에서 제 자리를 찾아갔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방영된 뒤, 나는 A 씨의 이야기를 더 자주 꺼내게 되었다. 예전에는 “그런 사람이 진짜 있어요?”라는 반응이 많았다면, 이제는 “아, 드라마에서 봤던 그런 분이군요” 하며 눈빛으로 공감해 주었다. 드라마 한 편이 만들어낸 인식의 변화가 반가웠다.
A 씨는 내게 살아 있는 ‘사람책’이었다.
그는 장애가 ‘다름’ 일뿐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다름이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그 책의 마지막 장에 적힌 문장은 아마도 이런 말일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우리의 태도입니다. 그들의 가능성을 믿고, 그들이 자신의 속도로 세상과 만날 수 있도록 조금만 기다려 주는 것.”
A 씨와의 만남은 앞으로도 내가 장애 인식 개선을 위해 작은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하는, 내 삶의 가장 든든한 뿌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뿌리는, 내가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눈길을 오래도록 따뜻하게 지켜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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