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나와 키보드 사이에

키보드와 내 작은 손, 둘의 이야기

by 서유미

내 다른 키보드는 기계식 키보드이다.


내가 좋아하는 베이지 색 몸체를 기본으로 회색과 베이지색의 키캡들이 배열되어 있다. 키캡은 손가락이 직접 닿아서 누르면 글자 입력을 하는 키보드의 버튼 부분이다.


원래의 키캡은 다른 색이었지만, 당시 키보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나는 키캡을 내가 좋아하는 모양과 색으로 바꿨다.


이만하면 나의 고유한 키보드가 완성된 셈이었다.


내 펜타그래프 키보드에 비해 거대한 몸집을 한 이 기계식 키보드를 책상에 놓자, 마치 기자나 작가라도 된 기분이 났다.


다만 놓쳤던 것은 이 키보드를 사용하며 누를 때 손가락에 꽤 많은 힘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키를 누를 때의 소리가 예상보다 커서 일하며 거슬릴 정도라는 점도 있었다.



전전 남친이 유독 사랑하던 것이 그런 기계식 키보드였다.


나는 그가 내게 주었던 짧고 짙었던 애정보다 자신의 키보드에게 준 그 마음이 더 길고 깊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키캡이라는 걸 교체할 수 있다는 것도 그에게서 배웠다.


어느 날 그의 책상에 놓였던 레고 같은 플라스틱 조각들을 보고 내가 무엇인지 물어보자, 그는 그것이 키캡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는 키캡을 키보드에서 하나하나 공들여 빼낸 뒤 씻어 말리고는 다시 끼워 넣는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의미 없는 고생일 뿐인데 왜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는.


곁에 있던 사람은 이렇게 어떤 식으로든 그 흔적을 남긴다.


전 사람, 내가 처음으로 사랑하고 사랑하는 그 사람은 아직 내 옆에 남아있다.

나는 그것을 애써 연보라색 구름이라고 여긴다.

손에 잡히지 않고 애써 흩뜨리려 하면 어느새 다시 모이는 구름.

내 옆으로 손바닥 하나만큼의 거리를 두고 둥둥 떠 있는 구름.


연보라 구름은 나에게 말을 건다.

내가 아직 그를 사랑한다는 걸 자신은 잘 알고 있다고.

그가 잘 지내는지 궁금하지 않냐고.

그가 날 잊었는지는 궁금하지 않냐고.

혹시나 그가 다른 행복을 위해 벌써 나아가 버렸는지 궁금하지 않냐고.


그 말들에 늘 칼로 베이듯 아파 몸을 감싸 쥐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나는 이제야 그 구름을 내 옆에 온 손님으로 생각하기로 한다.


그 구름은 여전히 끊임없이 내게 말을 해댄다.

이제 나는 그 말을 듣고는 구름 손님이 말을 하는구나 하고 조용히 다시 내 일로, 내 잠으로 돌아간다.



집에 있다는 것의 장점은 언제나 잠깐은 누울 수 있다는 것이다.


집중을 하다가도 금세 지쳐 버릴때면 잘 정돈된 침구 위에 힘을 빼고 눕는다.

마치 들어 올리기만 해도 흐물거리는 곰인형인 것처럼 나는 아무런 힘도 없이 축 늘어져 침대 위에 놓인다.

그러다 잠깐의 힘을 되찾으면 자리에서 일어나 해야 하는 일들을 시작한다.


늘 해야 할 일만 존재하고 하고 싶은 일은 와 주지 않는 날들이 서러울 때도 있지만, 살아내야 하니 어쩔 수 없다고. 이런 나와 꼭 같은 사람들이 오늘도 세상의 각기 다른 공간에서 움직이고 있을 거라고 여긴다.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을 만나고 나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깨끗하고 마른 몸.

가방이나 옷을 장식이 아닌 그저 생필품으로 여기는 마음.

때문에 물건이 별로 없어 비어 있는 공간이 더 많은 집.

느리고 낮게 말하는 목소리와, 딱 그 정도로 느리고 우아한 움직임.


이제는 그런 사람을 다시 만나야겠다는 마음 대신,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한다.

내가 그에게서 느꼈던 아름다움 전부를 내 것으로 갖는다면, 그를 바라는 이 마음이 조금은 잦아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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