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창작동화> 봉숭아꽃은 기억을 물들여요.

손톱에 남은 그리움

by 이다연





오늘 너는,
숲 속 가장 안쪽의 좁고 조용한 오솔길을 따라 걸었어.
햇살이 서서히 기울 무렵,
양옆으로 봉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핀 작은 공터가 눈에 들어왔지.

그곳엔 누군가 먼저 와 있었어.


하얀 얼굴, 슬픈 눈동자, 바람처럼 투명한 소녀.

“안녕. 너도 손톱에 물들이러 왔어?”


그 아이는 자신을 ‘연화’라고 소개했어.

네 또래처럼 보였고,

손끝은 햇살에 비친 안개처럼 투명했지.
그녀는 지긋이 봉숭아꽃을 바라보며 말했어.

“나는… 예전에 이곳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랑 같이 '봉숭아 꽃물'을 들였어.

약속했거든.
꽃물이 지워지기 전에 다시 만나자고.”


그녀의 목소리는 공기처럼 가볍고, 따뜻했어.

“그런데...
꽃물이 한 번도 들지 않았어.
어릴 적 어른들이 말했거든.
봉숭아 물은 귀신을 쫓는다고.

귀신은 절대 물들 수 없대.
그래서 난… 다시는 그 애를 못 만났어.”

연화의 눈에는 오래된 그리움이 고여 있었어.
너는 이유도 모른 채 가슴이 쿵 내려앉았지.


그때였어.
꽃바람이 살랑이며,

아무도 모르게 작은 빛무리 하나가 내려왔어.
보랏빛 날개를 가진 작은 요정이었지.


그녀의 이름은 리아.
연화의 곁에 내려앉아,

봉숭아꽃을 부드럽게 쓰다듬었어.

“너는 그 아이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이곳에 남아 있었던 거야.

너의 그리움이 봉숭아꽃에게 닿지 못한 건,
슬픔이 마법처럼 네 마음을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야.”


리아는 꽃을 어루만지며 주문을 속삭였어.
그러자 봉숭아꽃 한 송이가 조용히 하품하듯 피어나 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지.

“이제 마법은 풀렸어.
너의 사랑은 이 꽃에 물들 수 있어.

벌이 물어가거나
햇살이 말리지 못할 거야.”


연화는 꽃잎을 찧었고,
네 손톱과 자신의 손톱에 나누어 물을 들였어.
그 순간, 공터 가장자리에

또 다른 소녀가 두리번거리며 들어왔어.


바로 너였지.
그 아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친구,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났던 어린 날의 너.

연화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어.

“다온아, 나 기억해?
우리 여섯 살 때,
여름이면 손톱에 꽃물 들였잖아.”


너는 깜짝 놀랐지만,
어디선가 부드럽게 감싸오는 따뜻한 기억이
마음속에서 천천히 피어났어.

엄마가 말했던 그날이 떠올랐지.

“연화가 많이 아파서,
서울에 치료받으러 간대.”


그날 이후,

너는 연화를 다시 만날 수 없었어.
그래서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어.


그 장면을, 멀찍이서 지켜보던 또 하나의 존재가 있었어.
아이처럼 보이지만, 어딘가 다르게 맑은 눈동자.

그 아이의 이름은 마렌.

아직 요정이 되지 못한,
인간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존재.

마렌이 리아에게 속삭였어.

“연화는…
'봉숭아꽃 물'의 그리움으로
잊혀진 추억에 닿게 했어요.
사람이든 요정이든, 그건 기적이에요.”


리아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어.

“그래,
이건 마법이 아니라
진심이 만든 기적이야.”


에필로그

그날 해 질 녘,

공터 한가운데서 너와 연화는 손을 맞잡고 웃고 있었어.
붉은빛 꽃물이 너희 손톱에 천천히 스며들며,
아주 오래된 약속이 다시 이어졌지.


그리고 너는 알게 되었어.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진 게 아니라는 걸.

'봉숭아꽃 물'은 귀신을 쫓는 게 아니라,
잊힌 마음을 다시 불러내는 마법이라는 걸.

“기억은 시들지 않아.
보이지 않아도,
사랑은 언제든 다시 피어난단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