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 /추억 속의 빨간 구두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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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상가 ‘추억의 레코드’ 가게 한쪽.
달래는 먼지 묻은 레코드판을 넘기다, 오래된 앨범 한 장 앞에서 손이 멈췄다.
재킷 속, 환하게 웃고 있는 여자의 사진. 탄력 있고 젊은 얼굴, 깊게 파인 보조개, 검은 머릿결 위로 비치는 은은한 조명. 사진 아래 작게 새겨진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Alice.”
달래가 낮게 속삭이자, 턴테이블의 바늘이 긁히는 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그 순간, 눈앞의 풍경이 물결처럼 일렁이며 바뀌었다.
달래는 턴테이블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요정같이 예쁜 여자가 빨간 구두를 신고 턴테이블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음반의 속도를 따라 달래는 점점 깊숙이 빠져들었다.
어두운 클럽.
담배 연기가 천장 근처에서 느릿하게 흩어지고, 바의 금속잔들이 조명빛을 반사했다. 흑백의 레코드판 위로 빨간 구두를 신은 여자가 나타나, 탭댄스의 박자를 찍어냈다.
타다닥, 타다닥, 탁—
굽 끝이 바닥을 두드릴 때마다 미군들의 환호와 휘파람이 터졌다.
“Here she comes, baby!”
어디선가 술기운 섞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드디어 장막이 젖히며 앨리스가 등장했다.
검은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리듯 흘러내렸고, 빨간 립스틱과 구두가 조명 속에서 번뜩였다. 희디흰 피부 위로 미러볼의 빛이 오색 얼룩을 만들며 춤췄다.
재즈 피아노가 부드럽게 흐르다, 드럼 브러시가 속도를 올리며 그녀의 스텝을 따라갔다. 허리와 팔, 다리가 음악의 물결을 타고 오르락내리락했다. 절정이 다가오자 관객들의 숨소리가 거칠어졌지만, 그녀는 더 이상의 노출 없이, 몸짓 하나로 무대를 장악했다.
음악이 뚝 끊겼다.
홀 안에는 구두굽 소리만 남았다. 신들린 듯 격정적인 탭댄스, 땀에 젖은 머리카락, 아랫입술을 살짝 문 표정.
다시 불빛이 번쩍이며 절정의 순간이 스쳐갔다. 아쉬움 섞인 탄식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고, 공연은 간결하게 끝났다.
무대 아래. 잔잔한 더블베이스가 현을 울리고, 브러시 드럼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 속에서 앨리스가 관객 사이를 유유히 걸었다. 한 미군이 허리를 감싸려 하자, 그녀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그의 손목을 부드럽게 떼어냈다. 다른 미군이 애원하듯 속삭였다.
“Please… Come on, baby…”
앨리스는 장난스레 입술을 내밀며 손가락으로 그를 가볍게 밀었다.
세 번째 미군이 외쳤다.
“Please! Kiss me~~!”
그녀는 그의 무릎에 살짝 걸터앉았다.
“Okay.”
키스하는 시늉만 남기자, 폭소가 터졌다.
노래가 끝나자, 그녀는 경쾌하게 일어나 남자의 팔을 가볍게 떼어냈다.
흘낏 뒤를 돌아보며 미소 짓고는 휙 돌아섰다.
조명이 은은하게 바뀌고, 앨리스는 화려한 무대를 뒤로한 채 조용히 분장실로 향했다.
발걸음마다 우아함이 묻어났다. 문이 닫히기 전,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한번 바라봤다. 입가에 걸린 미소는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달래는 숨을 고르듯 눈을 감았다.
마치 1960년대 한복판에 서 있는 듯, 음악과 열기가 피부를 파고들었다. 이제야 자신이 어떤 곡을 불러야 할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