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잔 부딪히는 소리와 웃고 떠드는 소리로 가득한 여느 회사와 다를 것 없는 회식 분위기였지만
미묘하게 뭔가 다른 느낌이 감돌고 잇었어.
"도리야~"
"네 부장님! 한잔 올리겠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도대체 왜! 나타났는지 다른 부서 부장님이 아빠이름을 크게 부르더라고.
아빠가 무슨 힘이 있겠니? 안 반가워도 반가운 척, 안 신나도 신나는 척. 그렇게 밖에 할 수 없고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배운 신입사원일 뿐이었는데 말이지.
"햐~ 이 새끼 이거 술 잘 먹네 너 주량이 얼마냐?"
"아.. 솔직히 이미 취했는데.. 그래도 부장님 잔은 주시는 대로 받겠습니다!"
솔직히 별거 아니긴 했어. 그 당시 아빠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하루에 2팀과 돌아가면서 술 먹어도 안 취할 정도로
술을 잘 먹는다고 소문이 날 정도였거든.
"도리씨 ~ 여기!"
"네에!"
그렇게 부장님과 한잔씩 주고받고 있는데 아빠 나이대와 비슷한 남녀가 섞여있는 한쪽 구석 테이블이 보였어.
"하아... 죽겠네..."
비슷해 보이는 나이대 여서였을까.. 아니면 술김에 친구들로 보였던 걸까?
테이블에 앉자마자 살짝 몸을 틀어 앉으면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더니 그중 한 명이
기분이 나쁘단 듯이 한마디 하기 시작했어.
"뭐야? 다른데선 군기 바짝 든 것 같았는데 이쪽오자마자 확 풀어지네? 도리씨 이거 안 되겠네?"
"아.. 죄.. 죄송합니다"
노란 머리, 날씬한 체형, 웃음이 많고 장난기가 많아 보이는 얼굴. 그 사람은 겉으로는 화를 내고 있지만
이마저도 장난이다라는 말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표정을 못 숨기는, 거짓말을 못하는
그 사람의 첫인상은 아빠가 술을 많이 먹어 정신이 없는 상태였음에도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아.
"뭐야? 몇 살인데?"
"아~ 뭐예요 나 아직 화 다 안 냈는데!"
"도리 봐봐 하나도 안 졸았잖아. 너 장난치는 거 다 걸린 것 같은데?"
노란 머리 옆에 앉아있던 한 여직원이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로 날 쳐다보며 나이를 물었어.
노란 머리가 존대를 하고 살짝 어려워하는 걸 보니 노란 머리 보다 직급이 높아 보였어.
아빠의 나이를 이야기하자 노란 머리는 신난 목소리로 소주병을 들고 아빠에게 따라주려는 행동을 취했지.
"와! 나랑 똑같네? 그럼 이제 나도..."
"와 진짜? 그럼 나보다 어리네? 근데 어디서 본 거 같은데? 너 나 몰라?"
아빠가 흔하게 생긴 얼굴은 아니라서 혹시 아는 선배나 친구의 누나 일까 싶어 다시 한번 찬찬히 쳐다봤어.
"잘 모르겠습니다!"
기억이 날듯 말듯한단 표정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여직원의 모습이 조금, 아니 많이 부담스럽더라고.
"저... 와이프가 있는데 말입니다..."
-풉!-
우리 모습을 엿보고 있었는지 아빠의 말에 주변테이블은 웃음 참는 소리로 가득했고, 그 여직원은
뭔가 생각 낫는지 눈이 커지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가 금세 사라지곤 실눈을 뜨고 아빠를 바라봤어.
"나도 있어"
"아! 결혼하셨을 것 같았습니다."
"남편 말고 딸이 있어"
이해 못 할 말과 함께 자신의 잔을 채우고 입에다 신경질적으로 툭 털어버리곤 잘 들리지 않는 한숨을
안주로 삼키는 것 같았어.
"너 재미없다."
잔에 다시 술을 따르는 그녀. 나랑 나이차도 많아 보이지 않았어. 많아봐야 20대 후반일 텐데
그녀의 모습에선 알 수 없는 슬픔과 아픔이 보이는 것 같았어.
술을 따르는 순간에도 그녀의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으니까 말이야.
"다른 데 가서 놀아."
"저.. 성함이랑 직급이라도.."
"윤대리!"
성함과 직급을 알려달라는 말에 갑자기 경태형을 부르는 거야. 멀리서 큰 목소리로 떠들며 신이 나있던 경태형이 헐레벌떡 뛰어오기 시작했어.
"네 차장님! 아이고 술도 못 드시면서 무슨 술을 이렇게 드셨어요!"
나한테 그렇게 화내고 장난치고 짜증 내던 경태형은 어디 가고 꼬리 살살 흔드는 강아지가 되어버린
경태형을 보고 있으려니까 와.. 저게 사회생활이구나.. 싶더라니까?
"넌 인마 형이 차장님 잘 보필하라니까... 응? 소주 들고 뭐 하는가? 좌 소주잔 우 소주병? 전쟁 나가냐?"
양손에 소주잔과 소주병을 들고 있는 우스꽝 스런 모습에 경태형이 한마디 하자 한숨을 팍쉬며 상위에 잔과 병을 내려놓는 노란 머리였지.
"하아.. 내가 아까부터 도리씨 소주 줄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
테이블에 쓰러지듯이 엎드리며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이어갔어
"말이 안 끝나! 대화가 안 끝난다고! 줄만하면 누구 부르고 줄만하면 잔소리하고"
그때 그녀가 조용조용하면서도 살짝 날카라운 목소리로 경태형에게 말했어.
"신입 들어오면 팀 돌면서 인사시킬 때 차장급 이상은 이름 알려주고 외우게 지시해야지. 이건기본 아닌가?"
"아.. 사 차장님 또 왜 이래요~ 너 도리! 또 뭘 해서 우리 민예서 차장님 화나게 만들었냐? 그것도 재주다?"
"그게 아니고"
"와나 이게 사수가 얘기하는데 또 개념 없이 대드네? 너 따라 나와 인마"
도대체 내가 잘못한 게 뭔지. 그냥 회식자리 분위기 띄우고자 열심히 한 것뿐인데.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지
살짝 울컥하더라고. 사수에 뒤를 따라가는데 갑자기 사수가 휙돌아서 아빠옆으로 오더니 어깨동무를 하더라
"담배하나 피자?"
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 하며 따라나간 거 같은데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덧 식당밖 외곽에서 담배를 문체 경태형과 마주 보고 있더라고
담배를 크게 빨아들인 후 내뱉은 경태형은 내 어깨를 툭치며 얘기했어.
"민예서 차장님. 다시 말해 사차장님 조심해. 상태가 안 좋아."
"아.. 그분이 민예서차장님이에요?"
민예서, 예쁜 이름이다라고 생각하다가 갑자기 뭔가 이상한 거야.
"경태형? 근데 왜 민예서인데 사차장님이에요? 민차장님 이어야 되는 거 아네요?"
"그렇지 이게 좋은 질문이지. 자 왜 그럴까? 내일까지 알아보고 보고서 써와"
"..."
"야야 농담이고, 아까 못 봤냐? 저 여자가 상당히 사이코거든."
아.. 정신적으로 좀 아픈 사람인가? 싶어서 앞으로 그 사람 앞에 거슬리지 않게 피해 다니면서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지.
"그리고 애가 얼마나 사차원인지. 어린 게 싸가지 없이"
그렇게 담배를 피우면서 민차장 아니 사차장 뒷담을 하고 있는데 식당에서 우리 회사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고 있더라구
"두고 봐라 좀만 있..? 어? 벌써 끝난 거야? 왜 다들 나와?"
"2 차간대~ 경태야 신입 좀 그만 잡아라~ 내일부터 안 나오면 어쩌려고 그래?"
누군지 모를 사람이 경태형에게 2차를 간다고 얘기를 했고 경태형은 또 나를 혼자 버려두고
사람들 많은 곳으로 흡수되듯이 사라졌어. 이럴 때 그래도 옆에 누군가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덜 어색하고 힘이 돼주는 건데 말이지.
쏟아져 나오는 직원들 사이로 김 과장님이 나오는 게 보였지.
"야 도리. 너 신입이 어딜 자꾸 숨어 다녀"
"아.. 제가 숨은 게 아니고"
"짱 박히는 기술만 배워가지고. 너 2차에서 기대해!"
엄포를 놓고 사라지는 김 과장님을 시작으로 하나둘씩 나에게 말을 걸며 나가더라.
아빠는 마치, 그래 마을 입구에 있는 장승이 된 느낌이었어.
"어? 여깄었네? 2차 장소 들었지? 빨리 와요"
"형들이 괴롭히면 얘기해요~"
"도리씨!"
멀리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는데 아까 그 노란 머리직원이 여전히 좌소주 우소주병을 들고
날 쳐다보고 잇는 거야.
"네!"
"어디 갔었어! 술 줄려고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는 데에!"
내가 대답하자 온몸에 힘 빠진, 그러나 빠른 속도로. 마치 영화에 나오는 사냥감을 발견한 좀비처럼
아빠에게 달려오더니 억지로 소주잔을 쥐어주려고 하더라고
"받아.. 받아.. 이거 받어야 친구 되는 거야 받아.."
뭐에 홀린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모습이 웃기면서 귀엽더라고 아빠가 소주잔을 제대로 잡자 노란 머리는
"하~ 참 내가 진짜 와~ "
어이없는 한숨과 말을 내뱉으면서 소주뚜껑을 열고 아빠잔에 술을 채워줬고.
"모해요? 빨리 마셔! 그리고"
아빠는 술잔을 입에 갖다 댔지.
"이거 마시면 우리 사귀는 거다?"
"? 풉! 푸악! 머..머라구요?"
입에서 뿜어져 나온 소주는 정확히 그 노란 머리에 얼굴에 명중했고 소주가 얼굴을 타고 흘러 뚝뚝 떨어지고 있었어.
"하... XX 이거 내가 말실 수를 했으니.. 지랄을 할 수도 없고..."
뭔가 엄청 끓어오르는 걸 참아내며 말을 하는 게 다 보이더라고. 맞아 노란 머리는 표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그런 친구였어. 어떻게 보면 순수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몇 년 뒤 노란 머리는 그 성격 때문에 큰 전환점을 맞게 되지..
"죄... 죄송..."
아빠가 옷소매를 끌어내려 얼굴을 닦자. 손바닥으로 날을 세워 자동차 와이퍼 창문 닦듯이 자신의 얼굴을 훔치며 아빠 손까지 같이 밀어내더라고.
"이거 마시면 우리 친구 하는 거다. 친구, 친구! 아 왜 단어가 그렇게 나가..."
혼자 소리 지르고 혼자 화내더니 갑자기 우뚝 서서 곰곰이 생각하더니.
"생각해 보니까 실수로 내뱉은 단어 하나치곤 파급력이 엄청난 문장이 만들어지긴 했네"
고개를 끄덕이며 또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라고
'뭐야.. 애 무서워...'
괴기한 모습에 살짝 한 발짝 뒤로 물러 나려고 하는데 노란 머리가 고개를 돌려 아빠를 딱 쳐다보는 게 아니겠어?
"그래도! 마셨으니까 친구 하는 거예요? 나이도 같은데 그냥 하자 응? 친구?"
"네.. 하... 하죠"
친구 안 한다고 하면 집에 안 보내 줄 것 같은 분위기라, 그리고 그럴 것 같은 성격으로 보여서 일단
친구 하자고 얘기했지.
"좋아~ 2차 장소 들었어? 여기 길 건너서 노래주점이 있는데"
참 말이 많은 친구였어. 목소리도 살짝 하이톤이라. 좀 거슬리는? 그런데 솔직히 그날 아빠가
기분이 썩 좋은 날은 아니었잖니? 모든 상황이 그 친구의 첫인상을 정하는데 영향을 끼쳤는지
그 친구와의 첫 만남은... 그래 별로였어.
"아. 노래주점 가봤어? 술 마시면서 노래하는 곳인데."
'거참 되게 시끄럽네...'
"음 술래방이랑은 좀 다른데 우리도 뭐 자주 오는 건 아니고 지금처럼 여러 부서에서 같이 회식하거나.."
주머니를 뒤져 담뱃갑을 열었는데 딱 담배 한 대가 보이는 거야. 하.. 또 담배는 어떻게 사나.
지금 당장 집에 돌아갈 대리비도 없는데 라는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졌고. 담배라도 피워서
지워야겠다 싶어 담배를 입에 무는데 노란 머리가 입에 물린 담배를 손으로 딱 잡더니
바닥에 던져 비벼서 터트리더라고.
"담배! 몸에도 안 좋은 거. 그리고 술 먹고 담배 피우면 호흡이 빨라져서 담배에 유해 물질이 더 잘 흡수된다고"
그때까지 한마디도 안 하던 아빠가.
친구 하잔 소리 이후에 한마디도 안 하던 아빠가.
몸이 부들부들 떨리더니 가슴에서부터 입으로 딱 터져 나오더라고
"야이 XX새꺄 돛댄데 이 개 XX!"
노란 머리와 아빤 그렇게 첫 직장 첫 회식날 친구가 되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