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은행] 출금완료
일시: 20xx/xx/xx xx:xx
가맹점: XXX마트
금액: 240,000원
잔액: 4,260,000원
'아직 400도 더 남았네?'
그렇게 마트에서 신나게 쇼핑을 했음에도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밖에 줄지 않은
잔액을 보고 오히려 안심하며 우리는 저녁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향하고 있었어.
"예약하셨을까요?"
살짝 어두운 조명에 알아듣기 힘든 팝송이 흘러나와 약간 올드하지만
티비에서 종종 볼 수 있었던 조금은 고급진 분위기에 눌려
아빠는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어.
맞아. 이런 데는 온 적이 없었거든.
남자의 자존심이랄까? 객기랄까?
그냥 임신한 엄마에게 좋은 걸 먹여주고 싶었어.
"예약 안 하면 안 되나요?"
너무 비싸고 좋은데라 혹시 예약제로만 운영될까 싶어 물은 질문에
종업원은 촌스러워 보이는 아빠가 웃긴 건지 아니면 서비스업이라 습관이 된 건지
살짝 웃더라고
"두 분이시죠? 창가 쪽 뷰가 좋은데 그쪽으로 모실게요."
종업원의 안내로 창가 쪽의 자리를 잡자. 메뉴판을 넘겨주는데
여전히 생글생글한 미소를 머금고 있더라.
"메뉴 결정되시거나 도와드릴 일 있으면 벨 눌러주세요. 좋으시간 되세요"
종업원이 떠나고 메뉴판을 집어 들어 뭘 시킬까 고민하다가 또 갑자기 울컥하면서
올라오는 화에 그만 메뉴판을 식탁에 탁 하고 내려놓았지.
"재 왜 웃냐? 모를 수도 있지? 촌스러워 보이나? 돈 없어 보여서 그러는 거 아냐?"
혹시 다른 사람이 듣진 않을까? 종업원이 듣지 않을까? 그러나
와이프 앞에선 자존심 있는 남자로 보이고 싶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성질을 내고는
엄마를 쳐다봤어.
"어..."
사고가 정지된 듯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엄마는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없는 것처럼 보였지.
"마누라? 마누라?"
"어? 어! 아저씨.."
"뭐 해?"
"어? 어... 우와... 꿈 한번 되게 생생하다 그치?"
"뭐? 뭔 꿈?"
"아.. 이거 꿈 아니지.. 우와..."
어제까지만 해도 월세조차 낼 수 없는 상황에 잠들기 조차 힘들었는데.
하루 만에 레스토랑에 앉아 있으니 엄마는 많이 혼란스러웠던 것 같아.
그랬겠지. 엄마는 어느 때와 똑같이 집에서 똑같은 하루를 보냇을 거고
이렇게 된 건 모두 아빠의 노력 덕분이었으니까
다 내가 노력하고 내가 이룬 내 성과였으니까...
라는 정말 미친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때 아빠는 말이야...
"우리 뭐 사야 되지? 저번에 홈쇼핑 나오던 거 그 고기 먹고 싶다고 했었지? 그거 방송 아직 하나?"
"... 아저씨..."
"신발하나 살까? 임신 부종 때문에 발 불편하다고 그러지 않았어?"
"아니 아저씨..."
"이번주말에 백화점 가볼까? 머 살 거 없나?"
/ 짝 /
"이봐 아저씨!"
아빠가 자꾸 못 들은 척 혼자 얘기하니까. 엄마가 아빠 눈앞에서 크게 손뼉을 한번 짝 치는 거야
"어우 깜짝야. 뭐야? 왜?"
그제서야 엄마에게 눈길을 주는 아빠를 보며 엄마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눈빛을 보내며 입을 뗐어
"늦지 않았어. 우리 자수하자 자수하면 용서해줄지도 몰라"
"응? 자수? 용서?"
요즘은 대출받은 것도 자수하고 용서받아야 하나 싶어서 어리둥절해 있는데
"강도? 강탈? 빈집털이?
뭐가 됐던 좋아. 얼마야? 얼마 중에 얼마 썼어?"
"엥?"
어이없다는 아빠의 눈빛은 무시하고 아까 아빠의 모습처럼 엄마는 엄마만의 생각에 갇혀서
우울했다가 웃었다가 정말 누가 보면 미친 사람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감정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얘기를 하더라고
"헤헤헤 그래도 잘 얘기하면.. 아.. 아닌가? 감옥 가려나.. 그래도 괜찮아! 내가... 훌쩍.."
더 이상 놔두면 안 되겠다 싶어서 엄마의 멘탈을 다시 이 세계로 끌고 오기 시작했지..
"마누라 정신 차려! 그냥 대출 좀 받았어"
"알아 대출! 나도 아는데 월세내고, 음.. 아까 마트에서 쓴 돈만 24만원 인데..."
곰곰히 오늘 쓴 돈을 계산하며 말을 잇던 엄마는 역시 말이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휙휙 돌리더니
"그러니까... 우리 자수하자니까..?
전에 티비에서 봤는데 자수하면 형량도 낮춰주고 정상참작해서
무죄로 만들어주기도 한다니까.."
"하아.."
자꾸 엉뚱하게 생각하는 엄마 때문에 더 이상 숨길수가 없었지.
원래 받으려던 돈보다 더 받았다는 애기를 말이야.
"사실 백보다 조금 더 받았어"
"에? 얼마?"
그냥 얼마인지만 애기 안 하면 되지. 뭐.. 거짓말은 아니잖아?라는 생각에 그
냥 조금 더 받았다는 애기만 하던 아빠였지.
"얼마나 더 빌렸는데?"
"그냥 뭐.. 조금.."
"스프하고 빵 먼저 드리겠습니다. 이 스프는 버터에 구운... "
때마침 음식이 나왔고. 직원의 음식 설명덕에 화제를 전환할 수 있었어.
"그럼 좋은 시간 되세요"
"감사합니다! 마누라 먹어보... "
"씨이..."
정중한 인사와 함께 종업원이 돌아갔고 나도 드디어 비싼 음식 먹어본다는 생각에 들떠
엄마에게 빨리 먹어보자고 얘기하려 얼굴을 바라봤을 때 엄마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채로
아빠를 노려보고 있었어.
"어? 왜 울어?"
"씨이.. 야!"
평소 남한테 피해 주는 거 싫어하고 밝은 성격인 엄마가 정말 오랜만에 아빠를 '야'라고
그것도 사람 많은 곳에서 그렇게 불렀다는 거.. 정말 위험한 상황이라는 걸 갓난아기라도 알 수 있었지.
"어.. 왜? 왜 울어 왜?"
당황해하는 아빠를 여전히 노려보던 엄마는 앞에 있던 휴지, 포크, 숟가락을 툭툭 던지기 시작했어.
"너 디졌어. 왜 말을 안 해 왜? 어?
나 무슨 생각까지 했는지 알아? 어?
왜 말을 안 하냐고 나 걱정되게"
"야.. 야... 그만.. 와! 칼은 아니지 안 내려놔? 나도 애기 좀 하자고.."
이것저것 정신없이 던지다가 칼을 집어든 지도 모르고 던지려던 엄마였지만
아빠의 말에 자기 손을 쳐다보더니 화들짝 놀래서 다시 내려놓는 모습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
그날 그 외식은 오랜 가난에 지쳐있던 우리에게 하나의 쉼 그리고 위로였던 것 같아.
아니, 적어도 그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지.
그동안 잘 버텼다고, 고생했다고...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생각들을 한 걸까?
"어휴 무거워... 문 좀 열어줘"
"응!"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마트에서 산 것들을 집으로 옮기기 시작했어.
응 맞아. 아빠 혼자 옮기기 시작했지. 임신한 엄마를 어떻게 시키겠니?
"헉.. 헉.. 이제 끝.. 흐아아아.."
마지막 물건을 옮기고 그대로 현관 신발 벗는 곳에서 쓰러져 누웠어.
"고생했다 개도리~"
"나 물좀"
"엡!"
돈에 출처가 불법이나 범죄가 아닌 정상 대출을 받은 거라는 걸 이해시키기 얼마나 힘들었던지.
그래도 모든 사실을 알게 되니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어.
물론 얼마를 받았는지도 더 이상 묻지 않았어.
"응? 알아서 잘 받았겠지. 난 우리 아저씨 믿으니까?"
물어봐주지. 앞으로 어떻게 할지 같이 걱정이라도 해주지.
엄마의 믿음이, 엄마의 배려가 나중엔 원망이 돼서 돌려주게 되더라.
"흐아~ 살 것 같다. 그리고 이제 우리 뭐 사야 되지?"
"음.. 얼마 남았는데?"
엄마의 얼마 남았냔 말에 아빠는 주머니 속 핸드폰을 꺼냈어.
화면을 열어 문자를 확인하려는데 엄마가 자꾸 기웃기웃거리는 거지.
"아뭐해 철로가~ "
"씨이.. 나도 궁금하다고"
[국민은행] 출금완료
일시: 20xx/xx/xx xx:xx
가맹점: XXXXXX
금액: 80,000원
잔액: 4,180,000원
'아직 티도 안 나네?'
근사한 저녁을 먹었음에도 아직 400만원 대를 유지하고 있음에 다시 한번
안도를 하고는 이제 돈을 어디다 쓰지를 고민하는 아빠였지.
"곧 있음 아기 태어날 텐데 아기용품이라도 좀 사놓을까?"
"음.. 나 하고 싶은 거 있는데"
"뭐? 말만 해!"
"산후조리원..."
"에?"
산후조리원. 출산한 임산부들이 다시 임신하기 전처럼 몸 상태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업체라고 해야 되나? 아빠도 알고는 있었지. 그런데 시선은 항상 부정적이었거든.
"왜 굳이 산후조리원을 가야 돼? 200 가까이 내가면서?"
"애 낳고 관리 안 하면 나중에 고생 많이 한대. 바람만 불어도 뼈 시리고 또.. "
"무슨.. 우리 엄마대 사람들은 산후조리 안 하고도 다들 잘 사는구먼"
"그치? 그냥 돈 있다니까 욕심이 생겼나 봐 미안"
"다른 거 다른 거"
엄마는 많이 아쉬워하는 눈치였지만, 하지만 아빠는 크게 생각하지 않았어.
'정 하고 싶어 하면 나중에 해주면 되지.'
나중에라도 꼭 하고 싶으면 그때 하면 되지, 만약 돈이 없으면
지금처럼 대출이라도 받아서 해주면 되지.
일단 큰돈 들어가는 거니까 나중에 생각해 보자. 일단 필요한 것부터 사야 해.
아빠는 그렇게 나름대로의 소비 철학을 들이대면서
어렵게 애기한, 어떻게 보면 여자로서, 엄마로서 너무 당연했던 엄마의 요구는
무시하고 있었어.
"그럼 우리 다소 자가용 하나 뽑아쥬까?"
풀이 죽은 모습도 잠시, 갑자기 뭔가 생각 낫다는 듯이 박수를 짝치며 다시 들뜬 목소리로 얘기하더라고
"자가용?"
"웅! 우리 다소도 붕붕이 있어야지! 유모차!"
"하~ 유모차 얼마나 한다고~ 사자 사~ 아빠가 또 하나 뽑아줘야지 그까짓거 얼마나 한다고"
"오에~ 내가 알아볼게!"
"담배하나 피고 올게 천천히 골라"
엄마는 신나서 바닥에 주저앉아 쇼핑몰 검색을 시작했어.
하지만, 신났던 표정이 다시 어두워지기까진 채 10분도 안 걸렸던 것 같아.
"왜? 맘에 드는 게 없어?"
보일러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나왔을 때 아빠와 마주친 엄마의 표정이 좋지 않자
살짝 다가가 물었어.
"응... 아니? 근데 너무 비싸..."
120, 115, 98, 130...
엄마가 보고 있는 페이지를 봤는데 기본적으로 100은 넘어가더라고
"와.. 무슨 유모차가 이렇게 비싸?"
"하아.. 그러게.. 우리 엄마가 유모차 없이 다소 키우라고 나 이렇게 튼튼하게 낳았나 보다..."
계속 가격만 보는 엄마.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는 그 표정에서 아빠는
"사사~ 백만 원? 야~ 한 달 굶으면 되지."
"오... 오..."
"응? 반응이 왜 이래?"
"오..."
이상한 소리를 내며 아빠에게 다가오더니 갑자기 아빠의 배를 어루만지기 시작했어.
"오...??"
"아 뭐야 왜 이러는데?"
"오... 장기는 그대로인 것 같은데.. 도대체 대출을 얼마나 받았길래 이러는가 자네?"
이대로 있다간 엄마 페이스에 넘어가서 대출받은 금액을 공개해야 할 것 같았던 거지.
아빠에게 매달려 있는 엄마를 재빠르게 밀어내고는
"아 뭐야? 안 살 거야? 그럼 말고"
"아니 아니~ 지금 주문.. 진짜 한다?"
"하라고오!"
[국민은행] 출금완료
일시: 20xx/xx/xx xx:xx
가맹점: XXXXXX
금액: 1,150,000원
잔액: 3,030,000원
"오예~ 다소야~ 아빠가 신차 뽑아 줬다요~"
신나서 배를 쓰다듬던 엄마는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이 또 아빠를 부르기 시작했어
"아저씨 아저씨 그거 했어?"
"응? 뭐?"
"내가 지금 생각난 건데.. 우리 월세가 1달 밀린 거잖아. 그럼 이번 달 것도 내야 되는 거 아냐?"
"하아.. 난도 또 뭐라고.. 내면 되지.."
[국민은행] 출금완료
일시: 20xx/xx/xx xx:xx
출금계좌번호: XXXXXX
금액: 500,000원
잔액: 2,530,000원
그렇게 아빠도 모르는 사이에 마르지 않을 것 같은 샘은
점점 마르고 있었고.
그 이후에 몰아칠 후폭풍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