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 「봄밤」 리뷰와 에피소드
오후의 햇살이 공원의 광장 한가운데를 뜨겁게 관통한다. 오랜만이었다.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광합성을 하려는 듯 저마다 가슴을 내밀며 해바라기처럼 움직였고, 오후의 그림자는 자꾸만 길어졌다. 마켓 스퀘어 한편 노랗고 초록의 배색이 들어간 파라솔 아래에서 앤을 찾았다. 세계 유수의 대학가라지만 실제로는 촌 동네에 불과한 이곳에서 지나치게 흰 피부의 여자와 대조적으로 검은 눈에 검은 피부를 가진 아기의 모습은 유난히 도드라졌다. 심지어 에일리언이라 불리는 나에게조차 그들은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아이의 순하고 동그란 눈과 블렌딩 된 검은 피부, 작고 귀엽게 곱슬 진 머리카락을 떠올렸다. 아이의 곱슬머리가 부드러웠나? 아니면 억셌던가?
앤은 불과 3주 전부터 중상급 과정의 학생들에게 LCCI(런던 상공회의소 시험) 작문과 Oral Test 수업을 하고 있었다. 독특한 런던 악센트에 언뜻 보면 다이애나비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얼굴의 백인 여자. 동시에 할렘가 흑인 소녀에게서나 볼 수 있는 주저 하듯 서글픈 눈빛을 가진 앤. 숨기지 못하는 그 서글픈 눈빛 때문에 나는 그녀가 떠나온 런던에서도 이곳에서도 주류가 아님을 깨달았다. 감정 표현을 할 때면 더 짙고 선명해지는 그녀의 에메랄드 눈빛은 수시로 사람을 매혹시키기도 하고, 좌절시키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멍하니 광장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피곤하게만 보인다.
그녀가 온 첫 주, 마켓 스퀘어에 과일을 사러 갔던 나는 앤과 마주쳤다. 먹음직스러운 크기의 체리, 오목 볼록하고 작은 서양배를 함께 구입한 뒤, 우리는 테라스 카페에 앉아 짙은 홍차를 주문했고, 우유를 넣어 마시며 런던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런던이라는 도시가 문화의 다양함을 인정하기에 민족, 문화, 인종, 언어가 뒤섞이며 자연스럽게 서로 공존할 수 있는, 상당히 쿨한 동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국에 도착한 직후 런던의 고물가를 감당하며 두 달간 지내보았다. 곳곳에서 보이는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느끼면서 나는 이 도시에서만큼은 다르다는 게 매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고 말했다. 물론 짧은 두 달이라 직접 피부로 경험하지는 못했다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앤의 표정에서 긍정인지 부정인지를 읽기는 힘들었다. 잠시 생각한 뒤 앤은 그 반대편도 이야기해 주었다. 런던이라는 도시에는 나 같은 뜨내기가 들여다보지 못한 미개한 계급의식이 남아있다고, 그건 런던에서 한참을 살아본 자신도 이해할 수 없고 해소할 수 없는 거라고. 그녀는 afro-american인 군인 남자친구를 사랑했다고 한다. 그의 결핍과 부족한 것들 역시 사랑했다고 한다. 그들은 런던에서 쉽게 섞이지 못하였고 그는 그녀 곁을 떠났다. 홀로 된 이후의 시간들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앤은 이곳의 생활이 어떤지 나에게 물어보기도 했고, 나는 세계 각지에서 온 다양한 외국인 학생들이 많아 재미있다고 답하였다.
그녀는 도착한 지 3주 만에 학교에서 쫓겨났다. 수업 중 학생들이 다 지켜보는 가운데, 처음에는 학교 측의 정중한 요청이, 그다음에는 가방을 복도로 내놓는 물리적 강제와 함께 그녀는 교실 밖으로 내쳐졌다. 나 같은 에일리언도 받아주는 이 도시가 이들 모녀에게는 왜 이다지도 가혹할까? 나는 아직도 그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학생들의 수군거림 속에서 그녀가 낳은 혼혈아가 문제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21세기 위대한 나라 영국에서 내가 짐작한 이유로 내쳐진 거라면 너무 후지지 않은가?
앤은 2주 전 나와 함께했던 카페 같은 자리에 앉아있는데 나는 쉽사리 다가가지 못했다. 자전거 자물쇠를 물리면서도 나의 상념은 깊어만 갔다. 우물쭈물 그들을 바라보던 나는 깊숙한 한숨과 함께 머리를 흔들었다. 설익은 생각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오랜만에 햇살 좋은 그날,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가끔 그녀는 취한 눈으로 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곤 했다. 취한 그녀를 업었을 때 혹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로 앙상하고 가벼운 뼈만을 가진 부피감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 봄밤이 시작이었고, 이 봄밤이 마지막일지 몰랐다.
수환은 진통제 기운이 떨어질 때까지 영경이 마지막으로 사라진 지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권여선 『안녕 주정뱅이』 「봄밤」, 창비, 2017)
봄밤에 시작돼서 봄밤에 끝난 이야기. 권여선 작가의 『안녕 주정뱅이』 첫 번째 소설인 봄밤은 작가의 짤막한 문장 하나로 정리되었다. 그가 그녀를 옆에 두고 앉았다는 것과 그녀가 취한 와중에도 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본 것. 아픈 그대가 아픈 그대를 알아본 것이다. 영경의 앙상한 몸은 이 사랑의 위태로움을 연상시켰고, 봄밤에 시작된 사랑이 수환의 진통제가 떨어질 만큼만 이어지리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진통제 기운이 떨어질 때까지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영경의 뒤통수를 바라보던 수환의 마음속에 깃들었을 생각들.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내가 버틸 수 있을까? 혹은 그녀는 무사히 잘 돌아올까?
첫 만남에 영경과 수환은 귀신같이 서로의 결핍을 알아본다. 그의 실패와 절망 그녀의 상실감, 그의 아픔과 그녀의 아픔이 쓸쓸하게 교차하는 순간 서로는 사랑에 빠진다. 이 둘은 그 부족함까지 사랑할 수도 있겠다가 아니라, 그 부족함 때문에 서로를 사랑할 수 있었다. 정상적인 사람은 절대 이해할 수도, 손을 뻗으려고 하지 않을 이유 때문에 사랑이 가능하다면, 심하게 절뚝거리는 이 사랑은 대체불가의 사랑이고 완벽한 사랑이다. 그들은 결국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미약한 존재이지만, 둘이 함께라면 남은 삶이 절망스럽지만은 않으리라는 걸 감지했다. 서로가 마지막 행운이었다.
막차를 타고 읍내에 내린 영경은 편의점에 들어가 맥주 두 캔과 소주 한 병을 샀다. 편의점 스탠드에 서서 맥주 한 캔을 따서 한 모금 마신 후 캔의 좁은 입구에 소주를 따랐다. 또 한 모금 마시고 소주를 따랐다. 그런 식으로 맥주 두 캔과 소주 한 병을 비우는 데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몸은 오슬오슬 떨렸지만 속은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꽉꽉 조였던 나사가 돌돌 풀리면서 유쾌하고 나른한 생명감이 충만해졌다. 이게 모두 중독된 몸이 일으키는 거짓된 반응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까짓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젖을 빠는 허기진 아이처럼 그녀의 몸은 더 많은 알코올을 쭉쭉 흡수하기를 원했다.
(권여선 『안녕 주정뱅이』 「봄밤」, 창비, 2017)
중독이란 무언가를 탐닉하는 욕망의 심리이다. 어떤 것을 희구한다는 것은 적절한 삶의 활기와 동기부여가 되기도 하지만 지나치면 욕망하는 주체를 해치게 된다. 그럼에도 이 욕망을 버릴 수 없을 때 우리는 이 상태를 중독이라 부른다. 우리는 종종 중독자를 교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인간적으로 적대적으로 대하거나 비난하지는 말아야 하고 더불어 중독자의 권리도 인정해 줘야 한다. 그 권리가 그를 해할지라도? 그럼 영경이 외출하고 자유롭게 술 마시는 권리도 인정해야 하는가? 수환의 외출 허락이 영경의 병세를 악화시킨다 해도 그 허락을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인가? 중증 알코올중독자라 해도 술 마실 권리를 인정해야 하는가?
이 소설에서 중독이란 부분에 대한 논지는 의도하지 않은 사건으로 술이든 무엇인가에 의지해 삶을 살아가는 또 다른 중독자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고 싶다. 영경은 교사로 생활하다가 이혼 이후 부지불식간에 시댁에 양육권을 빼앗기고 아이와는 완벽히 분리되어 버렸다. 과정은 생략되고 어떤 획책에 의해 손쓸 새도 없이 아이가 먼 나라로 이민을 가버렸다면, 어떤 어머니가 제정신으로 견딜 수 있을 것인가? 그녀는 알코올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었다. 현실을 버텨낼 수 없었으므로.
수환은 부도, 파산, 위장이혼 후 돈을 챙겨 사라진 아내 때문에 건강보험조차 들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 결과 류머티즘 관절염을 방치해야 했고 관절염은 온몸에 퍼져가는 중이었다. 어느 봄날 조우한 둘은 서로를 알아보았고, 만난 지 일주일 만에 살림을 합쳤다. 영경의 알코올성 치매와 간경화도, 수환의 류머티즘 관절염 역시 이들의 사랑을 조금도 꺾을 수 없었고, 시랑은 깊어갔다. 이들은 동시에 사람에 중독되었고, 그 외에는 더 깊거나 높은 경지로 추구해야 할 대상을 더 이상 인생에서 발견하지 못하였다. 사람들이 죽을 자리를 찾아 어쩔 수 없이 들어가는 요양원에서 이들은 짧은 사랑의 보상이라도 마음껏 사랑하였다.
수환의 입장에서 보자면 영경의 외출을 방치하는 것은 아무것도 해준 게 없고 앞으로 해줄 것이 없는 그의 최선의 자구책이다. 수환에게 '외출 허락 밖에는 없다'는 절망이자 동시에 안도감이다. 남들은 그녀를 바꾸려 하고, 고치려 하며 잘못했다고 꾸짖으려 한다. 하지만, 수환은 있는 그대로의 영경을 인정하고 사랑한다. 그래서 그녀의 인내심이 마지막 상황에 부딪쳐서 폭발할 순간에 먼저 외출을 권하기도 한다. 이 순간을 알아차리는 안목 역시도 수환이 아니라면 힘들었을 것이다. 이것은 다른 형태의 진정한 사랑, 세월을 많이 겪어낸 어른의 사랑이다.
돌봄이란 것이 텍스트는 있지만, 기계가 아닌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지라 우리는 정상적이거나 바람직한 돌봄의 형태가 환자에게 꼭 필요하거나 도움이 어느 정도 되는지, 아예 도움이 안 되는지 정확히 판단하기 힘들다. 때로는 다른 차원의 돌봄이 필요한 순간이 있을 수 있다. 돌봄의 주체와 대상이 서로를 신뢰한다면 한 번뿐인 인생 어느 정도 일탈을 주는 것도 돌봄이 아닐까? 수환이 영경에게 술 마시면 일탈할 시간을 주는 것이나 술 마시느라 수환의 장례식을 지키지 못한 영경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고 본다. 백세시대의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또, 돌봄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