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이 좋다

by 맑은하늘

한가롭다. 심히 한가하다. 바쁘게 달려온 지난 날들과 달리 지금 나의 삶은 몹시 정적이다. 내 생애 처음으로 방향도, 목적도 없이 사는데 과연 잘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동안 앞만 보며 달리느라 평범한 일상을 놓치며 살아왔다. 엄마가 된 후부터는 이렇게 사는게 맞는지 끝없는 고민을 반복했다. 고뇌가 턱 끝까지 차오르자 미련없이 내가 힘겹게 오르던 성공가도를 이탈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자유를 얻었다.


학생 때 나의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공부하기는 싫지만 못하는 것은 더 싫어서 적당히 상위권을 유지했다. 수능 때 시험운이 있었으면 좋으련만 고등학교 입학 때 몰아서 왔다. 고등학교 입학 후 첫 시험을 도 전체가 같이 봤다. 어차피 수석이 목표도 아니니 공부를 안 했는데 아이들이 못 보는 바람에 내가 의도치 않게 도에서 최상위권 학생이 되었다.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고등학교를 시작했다. 어느덧 소문은 바람을 타고 퍼져서 다른 학교 아이들마저 마주치면 "너 서울대 법대 간다며!"라고 말해 나를 흠칫 놀래켰다. 과도한 이목 현상덕에 왠지 성적이 유지될 것 같아 나는 계속 공부를 적당히만 했다. 결국 도에서 최상위권이었던 성적은 학교에서 상위권으로 떨어졌다. 바뀌는 점수에 맞는 대학과 과를 찾으면 되니 성적이 흔들려도 사실 괜찮았다.


고등학교까지는 내가 원해서 한 공부가 아니었기에 공부할 때 참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무의미한 시간 속에 가족과 함께한 사랑넘치는 시간과 학교에서 아이들과 장난치고 놀던 시간이 나를 버티게 해주었다.


대학에 가서 나는 신세계를 맛봤다. 내가 공부를 하는지 안 하는지, 심지어 학교에 오는지조차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내가 배울 과목을 직접 선택해서 시간표를 짜는 것도 좋았다. 학교다니는 내내 우리 가족보다 내 성적에 더 관심갖던 선생님들과 아줌마들이 없어진 것이 가장 좋았다.


자유로운 대학에서 나는 배움의 갈증을 느껴 밤낮없이 공부했다. 성적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내가 몰랐던 것들을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로 지혜의 바다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4년 내내 온갖 역학을 배우느라 숫자와 씨름하면서도 궁금했던 중국어와 법, 경제학에 대해서도 열정적으로 배웠다. 1, 2학년 때는 중국어에 가장 심취해서 중국인 유해생 도우미도 했다. 3학년 때는 어려운 전공 과목들을 한꺼번에 듣느라 학기 내내 하루에 3~4시간씩 자다가 얼굴이 진한 갈색으로 변했었다. 이렇게 대학 생활 내내 알고싶은 것을 파고들며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다.


직장인이 되면 편할 줄 알았는데 매일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다. 6시 10분쯤 집앞에서 통근버스를 타면 회사에 7시 전후에 도착했다. 통근버스를 놓친 날에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출근하면 근무 시작 시간인 8시 전에 빠듯하게 도착했다. 이래서 다들 새벽에 일어나 통근버스를 사수했다.


바쁜 날들에 익숙해지자 나는 곧 관성의 법칙에 따라 공부를 시작했다. 중국어도 HSK 5급까지 따며 전문적으로 공부했다. 공부하는 김에 어릴적 꿈이었던 인권변호사에 도전하려고 퇴근 후 매일 밤 12시 넘어까지 공부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허리가 고장났다. 처음에는 앉아있기 힘들더니 급기야 눕는 것도 괴로웠다. 이마저 방치하자 호흡까지 어려워 마침내 연필을 내려놓았다. 이때 나는 퇴근 후에 책을 펴는 대신 물리치료를 받았다. 호흡도, 앉는 것도 편해졌을 때 의사가 운동을 처방했다. 허리에 좋은 걷기, 수영, 필라테스를 시작했다. 부글부글 끓어 오르던 엔진이 서서히 식어가는 날들이었다.


결혼 후 엄마가 되니 내가 추구했던 과거의 영광은 더 이상 무의미했다. 끝도 없는 경쟁에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달려가다 나이들면 해방되는 삶이 더 이상 멋있어보이지 않았다. 선두에 선 사람들의 삶 속에는 가족과의 추억이 없었다. 이렇게 내 인생을 미래의 성공을 위해 회사에 쏟는게 맞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의도치 않게 둘째를 낳으며 남편이 있는 작은 도시로 오게 됐다. 작은 도시의 작은 회사로 옮기니 사람들의 생각도 좁았다. 작은 옷에 억지로 나를 끼워맞추려니 숨이 막혀 마침내 그 옷을 벗어던졌다. 나를 더 높은 어딘가로 올려줄 사다리를 스스로 걷어차기까지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막상 내려오니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양손에 모든걸 다 움켜쥐고 살 수는 없다. 건강, 행복, 성공, 가족, 돈, 명예를 다 갖는다면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남에게 보여지는 높은 연봉, 좋은 회사, 높은 직급에 모든 것을 걸었던 나는 지금 가족과의 소소한 일상, 작지만 확실한 행복, 건강에 내 인생을 걸었다. 외적인 조건으로는 볼품없어졌지만 내적으로는 여유가 넘치고 행복하다. 새출발할 내가 앞으로 그려갈 미래도 궁금하다.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지금이라도 그걸 시작할 용기를 내보자. 당신의 미래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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