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여기 사인해줘. 우리 아빠 이름은 ○○○이야."
초등학교 3학년에 선생님께서 시험지에 부모님 사인을 받아오라고 하셨다. 숙제를 잊어버린 건지 부모님께 보여드리기 두려운 건지 사인을 못 받은 아이들이 내 앞에 줄 섰다. 붓글씨를 연필로 옮긴 듯한 내 글씨체를 보고 평소에 아이들이 아빠 글씨 같다고 했다. 그 사실을 기억했던 한 아이가 나한테 부탁하자 우르르 몰려온 것이다. 어른들을 속이기 싫어 써주기 싫은데 애들이 계속 부탁하니 내 손은 계속 움직였다. 당장이라도 선생님이 들어와 혼내실 것 같아 심장이 두근거렸다.
중학교 때 귀여운 글씨체가 유행이었다. 너도나도 삐뚤빼뚤 아기처럼 글씨를 쓰는데 내 연필은 여전히 붓글씨를 옮겨놓은 듯 묵직했다. 흐트러진 친구들의 글씨체가 부러웠지만 나는 또박또박 곧게 썼다. 유행을 좇지 않는 내가 우직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러한 나의 강직함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
글씨는 연필을 쥔 사람의 거울이다. 내가 힘주어 눌러 쓴 글자들은 어느새 내가 되어 돌아온다. 물론 내 손 끝에서 그어지는 선들이 항상 같은 것은 아니다. 급할 때는 글씨가 날아가고, 여유 있을 때는 차분히 종이에 내려앉는다. 신기한 것은 자세히 보면 글씨체는 같다는 것이다. 이처럼 글씨는 나를 나타내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이다.
취업할 때 모두 온라인 접수를 하는데 한 기업이 꼭 이력서를 손으로 써서 직접 제출하라고 했다. 그때는 왜 인터넷이 아닌 자필로 써내라고 하는지 이해 안 갔는데 이제는 알 것 같다. 글씨만 봐도 그 사람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 분이었으리라.
디지털 기기로만 글을 쓰다 보니 곧았던 나의 글씨가 요즘에는 춤을 춘다. 앞으로는 나의 거울인 글씨를 쓸 때면 힘을 주어 획을 그어야겠다.
여기 당신의 이름을 써보시라. 당신의 글씨가 당신에 대해 뭐라고 말해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