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돈 1,
너무 빨리 어른이 된 아이

by 수아롬

삶과 돈, 그리고 마음의 균형을 지키려 애쓰며 살아온 시간들.
그 안에서 달라진 마음의 흐름을, 두 편의 이야기로 건네보려 합니다.

어린 시절, 제게 돈은 괴물처럼 피하고 싶은, 불편하고도 어딘가 미워지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그 낯설고 복잡한 감정 너머에 있는 진짜 의미를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 어른


어른 세대의 많은 분들이 그러했듯이, 아버지는 몇 대를 이어온 장손으로 부모님과 일곱 남매 동생들의 생계는 물론 학비까지 책임져야 했다.

일 년에 열두 번이 넘는 제사를 꼬박꼬박 지내며, 집안의 경제까지 도맡아야 한다는 건 참으로 가혹한 짐이었으리라.

자식들 앞에서는 괜찮은 척, 단단한 존재로 보이려 애썼지만, 내 눈엔 삶의 무게에 짓눌려 마치 달팽이가 코끼리를 지고 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처럼...

그래서였을까.

아직 어렸음에도, 나는 일찍 철이 들어버렸다.
작은 것 하나 사달라는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엄마아빠의 삶이 너무나도 버거워 보여서, 깃털 하나라도 더 얹고 싶지 않았기에.


이런 배경 덕에 어른이 되어서도 누군가에게 마음을 줄 때, ‘장남’이라고 하면 괜스레 경계심이 생겼고, 자연스레 내 이상형의 조건엔 ‘장남은 제외’가 새겨져 있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삶을 지키기 위한 나름의 신념이 자리 잡기 시작한 건.

어른이 되면 힘껏 벌어,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내 가족의 삶을 생채기 하나 없이 지켜내리라 마음먹었었다.

아이였지만, 현실 앞에서는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버렸다.


신혼. 아무것도 없었지만, 모든 게 다 있었던 시절


결혼할 때, 부모님께서 작지만 목돈을 보태주셨고, 우리는 그 돈으로 신혼을 시작했다.

둘 다 어렸기에 가진 것은 적었고, 갑작스레 서두른 결혼이어서 미운털이 박혀 도움을 기대하기도 마땅치 않았다.

첫 보금자리는 9천만 원짜리 전셋집.

그 절반은 대출로 겨우겨우 마련했다. 매달 이자에 원금까지 갚아 나가다 보니 생활비는 늘 빠듯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행하지 않았다.

돈이 없으면 곧 불행할 거라 믿었던, 어린 시절의 생각과는 달랐다.

사랑하는 사람과 하루하루를 지내며, 물질은 내 행복의 주체가 아님을 조금씩 깨달았다. 없으면 없는 대로 그 안에서 멋지게 살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작은 집 안 가득 퍼지던 설렘, 퇴근하는 남편을 마중하러 다니던 소란스럽고 정겨운 시장길, 소꿉놀이하듯 서툴게 차려낸 밥상을 마주하며 나누던 저녁 한 끼, 모든 순간은 더 바랄 것 없이 충분했다. 친구들이 십시일반 모아 선물해 준 전자레인지, 전기밥솥 하나도 그토록 귀하고, 또 고마울 수 없었다.

부족한 것은 많았지만, 마음만큼은 넘쳐났던 행복한 시간이었다.


'어차피 아는 사람 없으니까, 괜찮다.'

그 시절, 내가 가장 많이 되뇌던 말이다.

빚을 조금이라도 갚아보려고 남대문 지하상가의 옷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결혼 전 하던 일과 관련이 있었고, 전부터 관심 있던 의류 도매 일을 배우는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매캐한 옷먼지와 사람들 몸에서 배어 나오는 열기가 뒤섞인, 끈적하고 답답한 공기 속.
한 평 남짓한 좁디좁은 지하 옷가게, 아줌마들로 북적이는 그곳에서, 내 발보다 작은 선반 귀퉁이를 아슬아슬하게 딛고, 팔아야 할 옷을 직접 입은 채

“신상 보고 가세요!”를 외치며 호객을 했다.


그때 내 나이 스물다섯.

자존심도 세고 창피한 것도 많았던 젊은 날.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결코 그 일을 감당하기란 쉽지 않았다. “어차피 아는 사람 없으니까 괜찮다. 저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를 주문처럼 마음속으로 외치며 움츠려드는 마음을 다잡았다.

몇 달 뒤, 일이 익숙해질 즈음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입덧이 점점 심해졌다. 아쉽지만, 지하의 탁한 공기가 태아에게 해가 될까 걱정되어 결국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쉽지 않은 날들이었고, 서툴고 부족했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단단했던 젊은 날의 용기가 아직도 선명하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는 더 알뜰하게 살아야 했다.

동대문에서 천을 사다 기저귀를 직접 만들어 빨고 삶아가며 아꼈고, 무려 1년 반 동안 모유 수유를 했다.

겨울엔 너무 추워서 가스 불 위에 커다란 스텐대야를 올려 물을 끓이며 집안을 데우곤 했다.

3만 원쯤 주고 산 접히는 유모차 하나. 그 하나로 사방팔방 얼마나 잘도 돌아다녔던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렇게 아이를 키워냈다.

돌아보면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았고, 쓸 때는 반드시 ‘이유’와 ‘계획’이 따라야 했던 시절이었다.

"돈 부족하지 않냐, 힘들지 않냐"는 부모님께 항상 “저희 돈 많아요. 충분해요.”라고 웃으며 대답하곤 했다.

어린 엄마였던 나는, 지금 돌아봐도 참 놀라울 만큼 씩씩하게 잘 살아냈다.




다음 글에서는, 돈을 버는 능력보다 쓰는 방향이 삶의 깊이를 결정한다는 생각에 대해 말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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