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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 피랍에서 귀환까지: 외교의 최전선에서(2)

해적들의 은신처에서

by 강행구

그러던 어느 날, 공관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는 스스로를 해적이라 소개했다.

“한국인 4명을 우리가 억류 중이다. 선주와 연락이 끊겼다.

이 위성 전화번호로 연락하지 않으면 한국인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


나는 즉시 경찰 영사를 불렀다.

“해적이 우리에게 직접 연락해 왔습니다. 선주 측이 의도적으로 연락을 끊은 상황에서 공관을 통해 협상을

압박하려는 전형적인 수법으로 생각됩니다.”

경찰 영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선주가 전략적으로 ‘무응답’ 카드를 꺼낸 듯합니다.

해적은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고 있을 겁니다.”


전화 한 통이 말해주는 것은 분명했다.

수면 아래 보이지 않는 줄다리기가 임계점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공관이 협상의 당사자가 되지는 않겠지만, 협상의 ‘구심점’이 흔들리지 않도록 촘촘히 받쳐 주는 일이

우리의 몫이었다.


며칠 뒤, 다른 소식 하나가 먼저 도착했다.

가나 인근 해역에서 납치된 중국 선박회사 사건이 타결됐다는 통보였다.

그리고 다음 날, 해적 근거지에 가까운 포타코트(Port Harcourt) 인근에서 인질들이 석방됐다.

그중에는 중국 어선에서 선장으로 일하다 피랍되었던 우리 국민도 있었다.


이제 우리 국민이 중국 선주 측이 마련한 항공편으로 포타코트에서 이곳 라고스로 이동할 예정이다.

우리는 공항에서 우리 국민을 맞이하고자 했으나, 중국 측은 입국 경로 노출을 극도로 경계했다.

결국 중국 측이 은밀히 마련한 임시 숙소에서 우리 국민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기다리고 있으니, 멀리서 차 한 대가 들어왔다. 우리 국민이 탑승한 차량이었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반갑게 맞으며 말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동안 많이 힘드셨죠. 건강은 괜찮으신가요?”

그는 피곤한 얼굴에도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억류 생활 동안 식사가 부족해 체중이 많이 줄었지만, 큰 문제는 없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피랍 당시 상황을 물었다.

“처음 해적들이 공격해 왔을 때, 어떤 상황이었나요?”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기억을 더듬었다.

“저녁 7시쯤이었어요. 식사를 마치고 선상에서 양치질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여섯, 일곱 명의 해적들이 배에 올라탔습니다.”

“그럼, 해적들이 다가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나요?”

“네. 주위가 어두웠고, 가나 항구 근처라 작은 어선들이 자주 오가다 보니

해적 보트를 구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이중 사다리를 이용해 배에 올라왔고, 모두 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순간, 이탈리아 해군 헬기와 해적들 사이의 긴박한 상황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신중하게 물었다.

“해적들이 선장님을 나이지리아 영해로 끌고 갔을 때, 이탈리아 해군 헬기가 추적해 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어떤 일이 있었나요? "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맞아요. 해적들이 고속 보트에 우리를 태우고 빠르게 이동하던 중, 갑자기 군용 헬기 한 대가 나타났습니다. 헬기에서 경고 방송이 나왔지만, 해적들은 총으로 우리를 위협하며 발포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게 했습니다. 그러고는 직접 헬기를 향해 총을 쏘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 긴박했던 순간이 얼마나 공포스러웠을지 짐작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때 정말 무서웠겠어요.”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공포스러웠습니다. 모두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해적들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치가 한동안 이어졌지만, 해적들의 위협이 거세지자 헬기도 결국 추격을 포기하고 돌아갔습니다.”


나는 이어서 억류 생활에 대해 물었다.

“해적들의 은신처에 도착했을 때 상황은 어땠나요?”

그는 차분하게 답했다.

“고속 보트로 20시간을 쉬지 않고 달렸습니다. 속도가 너무 빨라 바다 위를 튕기듯 지나가는데,

파도에 부딪힐 때마다 엉덩이가 아프고 정신도 혼미해졌죠.

은신처에 도착했을 땐 온몸이 기름으로 범벅이었고, 그대로 쓰러졌습니다.

거의 열흘 동안 아파서 움직일 힘조차 없었어요.”

“그동안 식사는 어떻게 해결했나요?”

“아침에는 빵 한 조각과 코코아 가루를, 저녁에는 ‘인도미’라는 현지 라면을 줬습니다.

하지만 늘 배고팠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그가 겪었을 깊은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정말 힘든 상황이었을 텐데, 잘 견뎌주셔서 감사합니다. 석방될 때 상황은 어땠나요?”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어느 날 해적들이 나가자고 하더군요. 배에 올라탔고, 한참 더 달릴 줄 알았는데 20분쯤 지나 다른 배로 옮겨 타라고 했습니다. 그 순간, 석방될 거라는 직감이 들었죠. 주위는 칠흑같이 어두웠고, 수로도 매우 좁았지만, 해적들은 그곳을 마치 자기 집처럼 꿰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해적들이 단순한 범죄 집단이 아니라 현지 지역사회와도 깊게 얽혀 있음을 가늠할 수 있었다. 나는 따뜻한 위로를 전하고 싶어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내가 정성껏 준비한 한식 도시락을 건네며 덧붙였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 음식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도시락을 받은 그는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한국 음식을 다시 먹을 수 있다니, 너무 행복합니다.”


중국 선박 사건이 일단락되며 잠시 한숨을 돌릴 수 있었지만,

베냉 연안에 억류된 우리 국민 4명은 여전히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물러설 수 없는 줄다리기는 계속되었고, 숫자는 곧 협상의 언어로 굳어졌다.

흘러가는 시간은 그 숫자에 무거운 이자를 붙여 나갔다.

우리는 매 순간을 단단히 붙잡은 채, 다음 접선, 다음 전개, 그리고 그다음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밤이, 다시 다가오고 있었다.


3편 〈“돌아온 사람들, 그리고 남은 과제”〉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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