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저물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나무에 피어 있던 꽃들은 어느새 낙엽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어릴 적에는 봄의 벚꽃을 그토록 좋아했는데 요즘은 오히려 가을이 좋다. 붉고 갈색이며 때로는 초록빛을 띠는 그 다채로운 색들이 내 마음을 비추는 거울 같다. 계절이 바뀌듯, 내 마음에도 서늘한 바람이 스며드는 듯하다.
가을은 흔히 독서의 계절이라 말한다. 나 역시 메모장에 읽고 싶은 책들을 빼곡히 적어 두었다. 한국에서부터 꼭 챙겨 일본까지 가져갈 책들도 몇 권 골라 놓았다.
어제 집 근처 카페에서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를 꺼내 들었다. 세 달 전, 지인의 추천으로 사두었던 책이었다. 책 위에 소복이 쌓인 먼지가 먼저 눈에 들어왔고 그 먼지를 털어내며 내 마음에 켜켜이 쌓여 있던 먼지도 함께 훌훌 날려 보낸 듯했다.
카페는 고요했다. 옆자리 부부는 아이패드로 영화를 보고 있었고 창밖 나뭇잎들은 햇빛과 바람을 따라 춤추듯 흔들리고 있었다. “오늘은 책이 잘 읽히겠다.”
예감처럼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작가의 내면과 명상 속 대사를 읽으며 “이건 내 얘기 같은데?” 하고 피식 웃기도 했고 마음에 필요한 문장 앞에서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깊이 받아들였다.
누군가 말했다.
“책을 읽는다는 건 그 사람의 인생을 발췌해 내 가슴속에 새기는 것이며 책장을 덮는 순간 작가가 내 곁에 온종일 머무는 것이다.”
얼마나 따뜻한 말인가
철학적이고 사려 깊은 이들의 삶을 엿보며 내 삶을 비추어 볼 수 있다는 건 큰 축복이다. 아직 미성숙한 나는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를 읽으면서도 친구들과의 대화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레 “내 말이 맞다”는 듯이 굴곤 한다. 그래서 책을 쓰는 이들이 더욱 대단해 보일 수밖에 없다.
오늘은 부모님과 함께 한옥 카페에 앉아 책을 읽었다. 밖에서는 비가 내렸고 왠지 자극적인 추리소설이 당겼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대신 빌린 '두 방문객'을 펼쳤는데 책을 소개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그날의 기분, 날씨, 장소에 따라 책을 고를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좋은지 새삼 느꼈다.
언젠가 또 책에 대한 관심이 뚝 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마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꼭 읽고 싶던 책들을 다 만나야겠다.
읽고 싶은 책은 열아홉 권. 그중 일본에 가져갈 책은 단 두 권이다. 성격은 다르지만 오래 전부터 마음에 담아 두었던 책들이라 기대가 더욱 크다.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고 있다면'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일본 가을 책상 위에 놓일 두 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