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이 없어도 괜찮네. 아니 오히려 더 좋았네
2025.10.20
오늘은 서울에서 약속이 있었는데 취소되었다. 어제 외할머니를 뵈러 문산까지 다녀와 집에서 쉬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가을이 가기 전에 사랑하는 종로 근처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마음도 생겼다. 여러 가지 집안일들을 마치고 나니 벌써 12시. 이미 시간이 늦어 '그냥 오늘은 쉬자'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은 삼성서울병원에 두 번째 정기검진을 가야 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옷을 입고 나섰다. 평소라면 버스 배차 시간을 확인하고, 동선을 미리 계획했겠지만 오늘은 그냥 흘러가는 대로 움직여보기로 했다. 아무런 계획 없이. 참고로 나는 파워 J성향이다.
집을 나선 지 한 시간 반쯤 지나 명동성당 근처 정류장에 도착했다. 배가 고팠다. 어디서 점심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서브웨이 모바일 상품권에 4,700원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마침 서브웨이 명동성당점도 있었다.
서브웨이에서 식사를 마친 뒤 같은 건물에 있는 서점으로 향했다. 오늘은 일부러 책을 들고 나오지 않았다. 아이패드를 챙겨 나와 가방도 무거웠지만, 북카페나 서점에서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을 골라 읽고 싶었다. 오래 고민하지 않고, 베스트셀러 섹션에서 가장 마음이 갔던 『다정한 사람이 이긴다』라는 책을 집어 들었다.
이제 어디를 갈까? 고민하며 네이버 지도를 뒤적이던 중 우연히 새로 오픈한 한옥 카페를 발견했다.
'여기다!'
곧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북촌마을에 있는 한옥카페였다. 대나무에 둘러싸인 고즈넉한 한옥 한 채와 야외 테라스도 있었다. 나는 따뜻한 말차라떼 한 잔을 시켜 야외 툇마루에 자리를 잡고 새로 산 책을 읽었다. 바람도, 햇살도, 공기도 완벽했다. 오늘 나오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한 시간쯤 지나 서촌 쪽으로 가보려고 나왔는데, 길 건너편의 '정독도서관'이 눈에 들어왔다. 몇 번이나 이 길을 지났지만 오늘 처음 눈에 들어왔다. 어차피 계획도 없으니 가보자 싶었다. 그렇게 향한 정독도서관. 주차장 뒤 쪽으로 공원이 있는 것 같아 둘러보고 가려는데, 넓은 잔디밭에서 빈백에 누워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나도 지금 그곳에 앉아 있다.
낮잠을 자시는 어르신, 책을 읽는 또래 여성, 데이트 중인 연인들, 다양한 모습으로 이 공간을 즐기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풍경이 믿기지 않을 만큼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이런 곳을 발견했다는 사실에 흥분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도 그중 한 자리를 골라 앉았다.
오늘 산 책을 읽다가,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울컥했다. 아니 울었다. 눈물이 날 만큼 행복했다. 오늘 나오지 않았다면, 계획대로 움직였다면 절대 만나지 못했을 순간이었다. 올해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기억될 것 같다. 자유로웠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빠니보틀이나 곽튜브 같은 유명한 여행 크리에이터들의 MBTI는 대부분 'P(즉흥적)'였다. 의도적으로 그들을 닮으려 한 건 아니지만, 요즘 나는 '즉흥적인 삶'에도 매력을 느끼고 있다. 계획은 물론 중요하고 무조건적으로 필요할 때도 있지만, 그동안 나는 계획이 없으면 모든 걸 망칠 것 같다는 불안 속에 살았다. 내 인생은 한 번도 계획대로 흘러간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나는 이제 느슨해지기로 했다. 즉흥적으로 움직이고, 흘러가는 대로 살아보기로 했다.
내가 암에 걸린 것도 계획 밖의 일이었으니까.
이제는 계획 없는 삶도 즐겨보려고 한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용기도 생겼다.
계획 없는 삶에는 예상치 못한 발견이 마음을 벅차오르게 하고, 눈물이 날 만큼 행복한 순간이 숨어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된 오늘이었다.
계획 밖의 삶에는 담담하고 의연하게!
계획 없는 삶에는 유연하고 여유롭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