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토끼 인형 : 취미에 처음으로 돈 쓴 날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 온 건 22년 4월이었다. 동네 산책을 하다 뜨개 공방을 발견했다.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였다. 가까운 거리에 동네 공방이라니 몹시 설렜다. 수강할 생각에 신이 나서 SNS검색 후 문의도 남겼다. 설레는 마음에 바로 등록하고 배웠을 거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수강 등록을 하기까지는 6개월이 걸렸다. 매체들을 이용하면 혼자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일 텐데 괜히 돈을 써야 할까. 취미에 돈을 쓰기 시작하면….이라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돈이 부족해서 못 쓴다기보다는 내 마음에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회사 출퇴근, 강아지 산책이면 하루가 끝나는데 여기에 무언가를 더 추가하는 것은 하루의 부담이었다.
뜨개공방 SNS에서 업로드되는 작품들과 수업 풍경을 계속 보면서 '나는 못 해.'라며 마음을 접었다. 그렇게 단념하고 회사, 집 하며 보통의 직장인처럼 살아갔다. 어느 날 회사에서 차장님이 '벌써 퇴근해?'라는 말에 화가 났다. '8시 퇴근은 야근도 아니지.'에 수긍하는 나를 보면서 더 화가 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왜 저렇게 생각했는지 어이가 없다.
그렇다 회사를 위해 내가 곱게 갈리고 있었다. 마치 회사가 나인 것처럼 그 일이 나인 것처럼. 일에만 사로잡혀 살았다. 반려견과의 산책 또한 의무적인 시간였고 퇴근하고 쉬지 못하고 해야만 하는 숙제였다. 이 시기에 뜨개 공방에 수강 등록을 했다. 사실 그때는 돌파구를 찾았다기보다는 이렇게 돈을 한쪽에 써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돈을 메우려고 일을 열심히 하게 될 것이라는 나를 옥죄이는 수단이었다. 주말 중 하루를 딱 정해서 2개월 수강. 토요일 근무일 때는 어떻게 하지? 등 여러 생각과 변수에 대한 걱정은 접어두고 우선 토요일에 가겠다고 했다.
수강료, 재료비 안내를 받았다. 비용에 멈칫했다. 하지만 지금 하지 않으면 언제 다시 시작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결제완료! 인형 기초 과정은 토끼 만들기였다.
일단 코를 잡고 다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도안대로 뜨다가 막혔다. 몇 단인지 모르겠다. 몇 코인지 모르겠다. 마음과는 다르게 손이 자꾸 멈췄다. 그럴 때면 선생님은 주변에 계시다가 어느새 내 옆으로 오셨다. 적당한 거리로 지켜봐 주시는 선생님이 좋았다. 내가 이 공방에 오래 다니게 되겠구나 수강 1일 차에 든 생각이었다.
토끼 인형은 두 개씩 떠야 하는 곳이 많다. 팔도 두 개, 다리도 두 개, 귀도 두 개. 선생님은 일정한 장력을 강조하셨다. 집에 가서는 뜰 수 있는 만큼만 뜨고 막히면 다음 시간에 같이 뜨면 된다고 하셨다. 뜰 수 있는 만큼만 뜨기. 살면서 사회는 나한테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라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각박했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는 없다고 나는 나한테 너무 모질게 대했다.
다음 수업시간에 인형 조립법을 배웠다. 한 코만 잘 못 연결해도 토끼 귀는 짝짝이가 되었다. 솜을 조금 더 넣었더니 얼굴이 길쭉한 토끼가 되었다. 잘못 연결된 귀는 선생님과 다시 달았다. 얼굴이 길쭉해진 토끼는 매력적이라고 칭찬받았다. 그 칭찬에도 나는 전전긍긍했다. 선생님의 토끼인형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사람마다 같은 작품이어도 다 다르게 만들어진다고 하셨다. 정답은 없다고 하셨다. 그렇다. 나는 인형 만들기가 처음이었다. 선생님의 긍정적인 피드백에 안심이 되었다. 얼굴이 길쭉하니까 더 귀여운 데! 히죽히죽 웃음이 나왔다.
칭찬과 함께 선생님은 다음 작품을 빠르게 준비해 주셨다. 집에 가서 떠와야 하니 어느 정도 뜨고 가자고 하셨다. 기초 작품을 빨리 떠야 원하는 작품도 뜰 수 있다고 하시면서 말이다. 이런 즐거운 압박감이라니!
숙제를 잔뜩 가지고 가는 길은 회사 일을 끝내지 못해 노트북 들고 가던 퇴근길과는 차원이 다른 즐거움이었다. 단순히 돈을 써야 그걸 보충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할 거라는 내 생각은 너무 얕은 생각이었다. 먼 미래에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걸 찾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걸 몰랐다.
사치토끼 인형은 경제적 행위 외에는 사치라고 치부하며 모질게 대했던 나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자신만의 즐거움을 위해 사치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나의 사치토끼와 숙제 한가득! 그렇게 나의 알찬 뜨개 생활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