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커튼 : 10살 내 강아지, 성산이가 아팠다
우리 집에는 10살 보더콜리가 있다. 이름은 성산이, 아주 천방지축의 아가씨이다. 크기도 작고 무척 활발해서나가면 “아가인가 봐요."라는 소리를 아직도 듣는다. 24년 3월의 어느 날이었다. 성산이와 꽁냥 거리던 남편이 성산이 턱 아래쪽이 부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며칠 지켜보다가 나아지지 않으면 병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보더콜리는 정신이 몸을 지배한다고 절대 자발적으로 쉬는 법이 없는 편인데 성산이도 예외는 아니다. 성산이도 쉬지 않고 놀고 나중에 아프다고 하는 편이다. 그런 애와 10년쯤 살다 보니 웬만한 상처에는 경과를 지켜보고 병원에 가게 된다. 너무 열심히 놀아서 다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동네병원, 며칠 후에는 조금 큰 병원으로 다녀왔다. 엑스레이를 찍고 일주일정도 약을 먹고 지켜보자고 했다. 나아지는 느낌이 없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아이가 달라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성산이가 병원 다시 가기 전에 밀린 일들을 끝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공방 수업을 다녀왔다. 이번에 떠야 할 자격증 작품은 커튼이었다. 커튼? 맞다. 문에 다는 길고 넓은 그것이다. 한 타래에 가득가득 감겨 있는 7볼의 실을 다 없어질 때까지 떠야 완성이었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하지 싶었는데 공방 미리 다녀온 것이 정말 다행이지 싶었다.
일주일 후에 찾아간 병원에서는 뜻밖의 결과를 들었다. 큰 병원 소개해줄 테니 가보라고. 병원에 데리고 가는 날 단단히 마음을 먹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아침밥도 먹이지 않고 성산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CT, 다른 검사 시에 공복이 필수 인건 사람이나 동물이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하는 단순한 생각으로) 소개받은 큰 병원으로 가서 각종 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아이가 깨어나면 설명드릴게요." 결과도 나오지 않았는데 눈물이 찔끔찔끔 삐져나왔다.
오전 10시에 가서 오후 4시쯤 검사가 끝이 났다.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커튼을 계속 떴다. 나가서 밥 먹고 오라고 알려주셨는데 다 귀찮았다. 그래서 계속 커튼을 떴다. 종양, 암 그 무시무시한 것들에 대해 찾아보고 싶지 않았다. 핸드폰을 멀리 뒀다. 진료안내 화면만 보고 뜨개를 했다.
종양이었다. 병원에서 놀랄 정도로 빠르게 발견해서 수술 예후는 분명 좋을 것이라는 말도 들었지만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수술 날짜는 잡혔지만 마음은 잡히지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산책을 하고 밥을 먹였지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커튼을 뜨면서 울었다. 집에서 나가고 싶었다. 아니, 나가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의 위로를 받고 싶었다. 아니, 혼자 있고 싶었다. 계속 커튼을 떴다.
커튼은 참 천천히 자랐다. 우는 만큼 자랐으면 금방 끝냈을 텐데. 걱정에 잠이 오지 않아 새벽까지 계속 작업했다. 수술이 끝난 후 면회가 가능했다. 하지만 멀리 보이는 내 모습에 일어서느라 수액줄 빠져버린 성산이를 보니 면회는 나의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병원에서 보내주시는 사진을 보면서 기다렸다. 집이 견딜 수가 없었다. 털이 풀풀 날리던 집이었는데 청소기를 돌리지 않아도 털이 날리지 않았다. 그 허전함이 사람을 무기력하게 했다. 그래서 뜨고 있는 커튼을 들고나갔다. 카페에 가서 커튼을 떴다. 계속 떴다. 카페에서 커튼을 뜨다가 생각들이 깊어지고, 걱정이 올라오면 훌쩍훌쩍 울기도 울었다.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뭐 어때, 대성통곡도 아닌데.' 하며 계속 뜨개를 했다.
커튼은 내 눈물을 먹고 쑥쑥 자랐다. 잘 헤쳐나가고 올 성산이를 씩씩하게는 못 기다렸지만 생산적인 것을 하면서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성산이가 퇴원하고 얼마 되지 않아 커튼을 완성했다. 세탁하고 주변에 자랑했다.
이건 눈물의 커튼이라고, 저 녀석이 아플 때 내내 뜨고 다 나았을 때 완성된 나의 부적이라고.
나는 성산이 수술도 시켰고, 살렸고, 커튼도 뜨는 멋진 사람이라고.
수없이도 무너졌던 그때 커튼숙제가 있어서 다행이다. 취미반만 다녔으면 슬퍼서 안 해. 하며 무기력해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격증에 대한 압박감이 그 시간을 견디게 했다. 살아가면서 힘든 일, 속상한 일,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정말 많다.
그런 순간에 나에게 뜨개가 있었다.
이 눈물의 커튼 덕분에 내가 뜨는 작품마다 이름을 다르게 붙여보고 글을 쓰게 될지 누가 알았을까.
인생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