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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의 설레임을 알리다, 화이트

이윤설의 '오늘의 잇컬러'

by 이윤설


[출처 : unsplash ]


어렸을 때 가장 신나는 날은

새 운동화를 신는 날이었어요.


엄마가 사준 새하얀 운동화.

티 나게 하얗고, 새 냄새가 솔솔 나는 그 느낌!


방 한가운데서 신어보고,

괜히 거울 앞에서 한번 더 포즈를 취해보기도 하죠.


그런데 새 운동화를 신고 친구들을 만나면

꼭 이런 말이 나옵니다.




야, 새 신발은 밟아줘야지~!




툭! 툭!


발등을 스치며 밟고 가는 그 장난…

기분은 좀 상하면서도, 또 어느새 웃고 넘어가게 됩니다.



생각해 보면, 흰색이라는 건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상태’이자,

무언가를 막 시작하려는 순간 느끼는 설렘입니다.


그래서 흰색은 시작을 상징하는 색입니다.


(좌) 영국 빅토리아 여왕과 알버트 왕자의 결혼식 장면 [사진 아이비브라이들 스튜디오 홈페이지] (우) 실제 웨딩드레스



그 시작의 설렘이라는 의미를 가장 크게 담고 있는 의식, 바로 결혼식입니다.

오늘날 ‘신부의 색’으로 당연하게 여겨지는 흰색 웨딩드레스는 사실 한 사람의 선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840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결혼식에서 순백의 새틴 드레스와 긴 레이스 베일을 착용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아름다움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침체된 영국 레이스 산업을 되살리기 위해 영국산 호니턴 레이스가 가장 돋보이는 색인 ‘흰색’을 택한 것입니다.

당시에도 표백 기술은 있었지만, 완벽한 순백을 구현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이 들었습니다. 특히 정교한 수작업으로 제작된 레이스는 매우 고가였기 때문에 흰 드레스는 곧 ‘부와 신분’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의 결혼식은 흰 드레스에 새로운 의미를 불어넣었습니다.

정략이 아닌, 사랑을 선택한 결혼이었기 때문입니다. 결혼식 장면이 삽화와 신문을 통해 널리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그 흰 드레스 속에서 순수함, 헌신, 그리고 사랑의 시작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후 흰색 웨딩드레스는 이상적인 신부의 이미지로 자리 잡았고, 산업 발전과 함께 전 계층으로 퍼져나갔습니다. 흰 드레스는 더 이상 ‘사치의 색’이 아닌, ‘서로를 믿고 함께 나아가려는 새로운 인생의 출발을 상징하는 색’이 된 것입니다.



[가위손(Edward Scissorhands)]




흰색의 설렘은 영화 속에서도 아름답게 표현됩니다.

영화〈가위손〉(Edward Scissorhands, 1990)에서 가위손 에드워드가 만든 눈송이가 하늘에서 흩날릴 때, 여주인공 킴이 그 속에서 천천히 돌며 춤추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현란한 가위 솜씨에 얼음 조각이 흰 눈처럼 세상에 흩뿌려지고, 그 속에서 팔을 벌려 춤추는 킴의 모습은 마치 동화 속 신데렐라 같습니다.


장면 속 흰색은 단순한 눈의 색이 아니라, 따뜻함과 사랑이 깃든 순수한 마음의 색으로 느껴집니다.

만질 수 없는 사랑이지만, 그 안에는 가장 인간적인 온기가 깃들어 있습니다.




[백설공주 한 장면]



동화 〈백설공주〉 속에서 흰 피부는 외적인 아름다움보다 더럽혀지지 않은 ‘깨끗한 영혼’을 상징합니다.

한겨울, 왕비는 창가에 앉아 바느질을 하다 바늘에 손가락을 찔립니다. 붉은 피 한 방울이 눈 위로 떨어지자, 왕비는 속삭입니다.




눈처럼 하얀 피부에, 피처럼 붉은 입술,
그리고 흑단처럼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를 낳고 싶다.




그 소망 속에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백설공주입니다.

이처럼 흰색은 세상의 처음을 알리는 탄생과 순수의 상징으로도 표현됩니다.


[출처 : unsplash ]




하늘에서 눈이 소복이 내려 세상을 하얗게 덮을 때면,

그 풍경은 마치 거대한 도화지 같습니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공간, 그 위에는

무엇이든 새로 그릴 수 있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느껴집니다.


“무엇을 그릴까?” 하는 그 설렘이 마음을 채웁니다.


그래서 흰색은 무한한 가능성과 시작의 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추상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흰색은 단순히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담을 준비가 된 상태다.





그리고 우리는 한 번쯤,

그 시작의 설렘을 마음에 품어본 적이 있습니다.


새 신발을 신고 처음 발을 내딛던 그 두근거림처럼,

흰색은 무언가가 막 시작되려는 설렘을 품은 색입니다.


저는 오늘도 삶이라는 하얀 도화지 위에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저만의 색으로 채워가고 있습니다.


오늘, 당신의 마음 위에 펼쳐진 흰 도화지에는

어떤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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