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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메랄드그린,
내 낙원은 아직 공사 중

이윤설의 '오늘의 잇컬러'

by 이윤설




[출처 : 캔바]






어릴 적,

46색 크레파스를 선물 받았던 날의 기쁨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12색 크레파스에는 없던 에메랄드그린

그 색 하나가 들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크레파스는 제게 ‘특별했습니다.


저는 그 색을 너무 아껴서,

몸통이 부러지지 않게 종이테이프를 여러 번 감아 사용했습니다.


반짝이는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공주를 그릴 때,

바다를 헤엄치는 인어의 비늘과 꼬리를 칠할 때,

가장 아름다운 곳에는 언제나 에메랄드그린을 쓰고는 했습니다.


그 색은 신비롭고 환상적이었으며 매혹적이었어요.

아직도 에메랄드그린을 보면

손에 닿지 않을 것 같은 다른 세계의 빛처럼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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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톤 에메랄드 그린




에메랄드그린(Emerald Green)이라는 이름은 1598년 처음 등장했습니다.

보석 에메랄드(Emerald)의 짙고 투명한 빛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2013년, 팬톤(Pantone)은 이 색을 ‘올해의 컬러(Color of the Year)’로 선정했습니다.

팬톤은 공식 발표에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Emerald, a lively, radiant, lush green.
A color of elegance and beauty that enhances our sense of well-being, balance and harmony.”



에메랄드그린은 단순한 초록이 아니라, 균형과 조화 그리고 회복의 감각을 일깨우는 세련된 색으로 정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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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에메랄드 섬 Town of Emerald Isle, NC (우) 에메랄드 캐년 tripbucket



에메랄드그린은 아름다운 자연의 색이기도 합니다. 비가 자주 내려 초록빛이 더욱 짙은 아일랜드는

오래전부터 “에메랄드 섬(Emerald Isle)”이라 불려 왔습니다.


윌리엄 드레넌(William Drennan)의 시에서 처음 등장한 이 별명은 이후 아일랜드의 상징이 되었고,

‘성 패트릭의 날’에 온 나라가 녹색으로 물드는 전통으로 이어졌습니다.


미국 오리건(Oregon) 주에는 ‘에메랄드 캐년(Emerald Canyon)’이라 불리는 협곡이 있습니다.

초록빛 강물과 바위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신비의 세계를 탐험하는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모험과 같이 존재하지 않지만 돼 마치 있을 것만 같은 지상의 낙원, 현실 속 판타지처럼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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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오즈의 마법사 (우) 슈퍼맨



에메랄드그린은 문학과 영화 속에서도 이상향과 신비스러움을 간직한 색으로 등장합니다.

오즈의 마법사의 에메랄드 시티는 황금 벽돌길의 끝, 모든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곳입니다.

영화 속 성벽과 건물들은 눈이 부실 만큼의 에메랄드빛으로 빛나며, 그 안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끝날 무렵, 그 도시의 진실은 드러납니다.


화려하지만 허구인, 진짜는 아닐지라도 모두가 꿈꾸는 이상향.


오늘날에도 ‘에메랄드 시티’라는 표현은 현실보다 아름답지만 실체 없는 환상을 상징합니다.

온전히 가질 수 없지만 그 이름만으로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낙원으로 존재하는.


에메랄드그린은 종종 이해할 수 없는 힘과 신비로움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영화 슈퍼맨 시리즈에 나오는 그린 크립토나이트(Green Kryptonite)는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크립토나이트는 초록빛으로 빛나는 수정으로, 그 광채는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찬란하면서 현실을 초월한 듯한 느낌을 줍니다. 차갑지 않으면서도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신비로운 존재의 기운을 품고 있습니다.


범접하기 힘든 능력을 가진 슈퍼맨은 크립토 나이트를 만나는 순간 신비로운 기운에 의해 모든 능력을 봉인당하고 평범해집니다. 설명할 필요도 없이 에매랄드 그린의 신비로움이 그의 능력을 무력화시키는 것입니다.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 (1901). 빅토르 올리바




19세기 인상주의 시대 예술가들은 이 색을 ‘예적 영감을 주는 빛’으로 여겼습니다.


예술가들이 사랑한 술, 압생트(Absinthe)는 쑥을 원료로 한 녹색 술로,

‘Green Fairy(녹색 요정)’라 불리며 화가와 시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습니다.

현실을 희미하게 만들고, 내면의 상상과 환상의 세계를 열어주었습니다.


그 술의 빛은 다름 아닌 에메랄드그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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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Roses, 1890 (우) 자화상(Self-Portrait, 1889)




빈센트 반 고흐는 그 색에 매료된 화가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작품 속 초록빛 병과 흔들리는 듯한 방,

카페의 불빛 사이에는 늘 그 ‘요정의 녹색’이 숨 쉬고 있습니다.

그는 자연의 모습을 단순히 재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환상의 세계를 그린 것입니다.

그의 후기 작품 장미(Roses, 1890)를 보면, 그의 마음이 향하던 색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화면 전체를 감싸는 연한 에메랄드빛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부드럽게 녹여내며, 마치 마음속 평온을 되찾으려는 치유의 공기처럼 느껴집니다. 고흐가 바랐던 내면의 고요함과 회복의 색이었습니다.


또 다른 작품 자화상(Self-Portrait, 1889)에서는 자신이 온통 에메랄드빛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배경은 단순한 색의 공간이 아니라 불안과 사유, 창조의 열기가 소용돌이치는 정신의 공간입니다. 그 안에서 그는 스스로를 응시하며 현실의 고통 속에서도 예술을 향한 열망을 잃지 않으려는 한 인간의 고독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에메랄드그린은 고흐에게 영혼의 거울이자 현실의 끝자락에서 자신을 지탱하게 한 마지막 빛이었습니다.




에메랄드그린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놓인 색입니다.

때로는 숲의 평화로, 때로는 꿈의 판타지로 다가옵니다.


누구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작은 판타지이자,

내가 이루고 싶은 이상향이자 갖고 싶은 소망의 끝없는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당신의 마음속 에메랄드그린은 무엇을 찾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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