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다르고 너 다르다

나와 우리를 규정하는 이기적인 기준들

by 헤리나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 각자 슬픔의 정도는 다르다.

위로자의 입장으로 조문을 가던 나와 슬픔에 잠겨 조문을 받는 입장의 나는 다르다.


조문한 사람들은 잠시의 조문 후 자리를 옮기면 오랜만에 보는 지인을 발견하고 반가워한다.

그들을 보며 뭐 저렇게까지 활짝 웃고 수다를 떨고 싶을까 미워했다.


그 후로 수년이 지나는 동안 나는 다시 위로자의 입장으로 조문을 간다.

상주와 진심 어린 눈빛을 나누고 깊은 포옹을 한 후 자리를 옮겨 식당으로 간다.

1년 만에 보는 오랜 친구, 동창들이 너무 반갑다.

근황을 듣고 이야기하고 술잔을 기울이니 참 즐겁다.

나도 별다르지 않음을 그제야 안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장손인 아빠가 명절과 아빠의 조부모 기일을 우리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였다.

기일과 설, 추석에 세 분의 작은할아버지와 가족이 우리 집으로 오셨다.

아빠는 조부모이고 작은할아버지들은 부모님 기일이다.


일 할 사람은 엄마 아빠뿐이고, 제사에 오는 식구들은 모두 손위 사람들이었다.

다들 지방에서 기차를 타고 와 하룻밤을 우리 집에서 묵고 가셨다.

시골 대가족 시절을 겪어 자는 사람도 방을 내주는 사람도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우리 엄마 많이 힘들었겠다.

청소, 이불 빨래, 음식 준비, 그릇과 상 준비를 모두 엄마 혼자 하셔야 했으니 말이다.

나도 돕는다고 잔심부름 정도 했지만 그게 얼마나 도움이 됐겠나 싶다.

후에 ktx가 생기자 당일 밤에 바로 내려가셔서 엄마 얼굴이 활짝 피었다.

막차 시간에 맞게 서울역까지 모셔다 드리는 일은 아빠가 하였다.


작은할아버지들 자녀들이 직장, 학업으로 서울에 자리 잡자 우리 집은 호텔 라운지 역할을 하였다.

오랜만에 지방 부모 서울 자식이 만나니 서로 애틋하여 더 먹어라 더 드셔라 권하며 맛있게 드시고 자식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자녀가 사는 서울 집으로 가셨다.

"질부 고생했다 수고했다"인사를 남기고 봉투를 받아 가셨는데 서울까지 오시는 게 미안하다며 아빠가 교통비 명목으로 여유 있게 담은 돈봉투였다.

아빠 밤운전 안 해도 되고 엘리베이터 배웅으로 마무리된다고 엄마는 또 좋아하셨다.

그분들은 새벽부터 집을 나와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니 뭘 사 오긴 힘들다며 빈손으로 오거나 우리 집 근처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과 과자 등을 사 오거나 과일 가게에서 수박 한 덩어리를 들고 오셨다.

그러나 서울 자식들에게 줄 물건들은 따로 챙겨 와 그대로 들고 가셨다.


손 아래 조카 집에 오는 일이 그렇게 만만한가 보다.


엄마는 기분 나쁜 내색은 하지 않으셨다. 그분들이 사 온 편의점 봉투를 받고 잘 먹겠다 인사하며 냉장고에 넣었다가 식사 후 후식 때 함께 곁들여 내갔다.


세월이 흘러 그 자식들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당신들도 명절에 집에서 맞을 가족이 생기자 설과 추석은 각자 보내고 당신들 부모 기일에만 오겠다 통보하셨다. 1년에 네 번에서 두 번으로 줄었다고 엄마는 또 좋아하셨다.

어느 기일에 우리 집 거실에서 작은할아버지 두 분이 사소한 언쟁을 하다가 가실 때는 풀고 가셨다.


그리고 돌아온 다음번 기일 저녁

아무도 안 왔다.

청소하고 음식하고 다 차려 놓았지만 연락도 없이 안 왔다.

기다리다 전화해 보니 이제 당신들 나이도 있어 서울 가기 힘들고 각자 집에서 하기로 했다고 한다.

형제들 자식들과 상의해서 결정했고 조카인 우리 아빠에겐 연락도 안 해준 거다.

기다리다 전화한 아빠가 '안 올 거면 미리 연락 주시지 음식 해놓고 기다리는 사람 생각해서'라고 하자 '손 아래가 먼저 전화해서 오시는지 물었어야 한다' 하셨다. 누군가 했겠거니 미루다가 전화받자 민망해서 되려 성을 낸 것이겠지 진짜 아빠 잘못이라는 건 아닐 거다 위로했다.


그렇게 우리는 그저 장소와 음식 제공자였던 것이 확실해 보였지만 엄마는 마냥 좋다고 하셨다.

엄마가 오지 마라 한 것도 아니고 당신들끼리 결정한 거니 오늘 연락 없이 안 온 것도 다 ~괜찮다고 하셨다. 남은 음식이 뭐가 문제냐 나눠 주고 냉동실 있고 괜찮다고 말이다.


그동안 작은할아버지 세 분이 서로는 형제고 그 자식들끼리는 사촌이라 만나면 친밀하게 서로 안부를 묻고 개인적으로 주려고 가져온 것들을 건네며 웃었다. 우리 집 거실이니 나도 그 자리에 있어 멀뚱이 지켜봤는데 엄마는 밥 하느라 못 본 줄 알았다.

그런데 지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엄마도 다 보셨더라.

아빠가 손아래고 나중에 혹시라도 '질부는 이거 이거 못 했다' 소리 듣기 싫어서 아무 내색 안 했다고 하셨다.

그땐 내가 미혼이어서인지 그런가 보다 했는데 나이 들수록 그 어른들에게 화가 난다.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말이다.


내 공동체 안에서 다정하고 사랑을 주는 것은 쉬운 일이다.

내가 그 선 안에 들어갔을 때는 몰랐던 이기심들이

내가 선 밖에 있어보니 잘 보이고 서러워진다.


나는 얼마나 많은 선을 그어 놓고 한정적인 배려를 하고는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사는 걸까.

생각하다 보니 너무 많아 다른 사람 못 됐다 소리도 못 하겠다.


계속 생각하는 수밖에

나와 네가 다르지 않다.

리어카 뒤에서 서행하는 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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