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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멀리서 온 손님, 멀리서 바라보는 나

#서점의기쁨과슬픔 #비정기산문집

by 서점원

7월

03


최근에 인스타그램 dm으로 책을 예약하고 찾으러 온 분이 있었다. 학생이었는데 얘기를 나누다 보니 글쎄 인천에서 이곳까지 왔다고. 1호선을 타고(부평선을 타는 한 단계를 더 거쳤을 수도), 4호선을 환승하고 도착했을 여정. 동네 책방을 찾아다니는 것을 즐겨서 우리 서점 오픈 초창기부터 줄곧 와보고 싶었다고 했다. 감사해라!


나에겐 인천에 사는 친구가 몇몇 있는데 그들이 서점을 방문하면서 내뱉는 첫 번째 말은 약속이나 한 듯 다 똑같았다.

“여기 너무 멀어.”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천과 서점의 위치를 지도상에서 선으로 그으면 대각선 끝과 끝에 놓여있으니 맞는 말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는 터라 이곳까지 오는 여정의 고단함 그러나 좋아하는 공간을 경험하러 가는 설렘이 모두 느껴져 고마우면서도 함께 반가워할 수 있었다.

그분은 찬찬히 책방을 살피고 예약한 책을 구입했고, 우리는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할인을 해주고 굳즈도 전하며 알찬 시간을 보냈다. 연극을 보러 혜화에 종종 오니 그때 또 방문하겠다는 인사를 남긴 채.


오늘은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각에 앳된 학생이 서점을 찾았다. 세계문학전집 코너를 한참 보더니 고전소설 두 권을 내밀었다.

헤르만 헤세 ⟪데미안⟫ 그리고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학생은 무려 고등학생이었는데 친구를 만나러 왔다가 우연히 서점에 들렀고, 친구가 재미있다며 추천했던 책을 발견해 구입한다고 말했다. 심지어 그 친구는 4호선 종착역에서 이곳까지 왔다. 이 또한 머나먼 여정. 더 놀라운 것은 고등학생이 서점을 방문했다는 것.

나의 서점 근처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가 있는데 중학생은 종종 엄마와 함께 서점을 찾곤 하지만, 고등학생 손님은 아직까지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아마도 첫 손님. 게다가 고전소설을 읽는 고등학생이라니! 친구가 추천해 주고 그걸 실행에 옮기는 고등학생이라니!


나는 그 학생에게 정말 좋은 선택이라고, 지금 고전을 읽고 십 년 후쯤에 다시 읽으면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거라고 말해주었다. 내가 어릴 적 읽었던 고전은 ‘잘 모르겠다’로 점철되었는데 한참의 시간이 흘러 다시 읽은 고전은 말 그대로 새로움 그 자체였다. 그때는 그냥 글자를 읽은 거고, 시간이 흐른 후엔 단어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와 박혔다.

이 학생이 십 년 후에 이 책들을 다시 읽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십 대에 읽은 고전’이라는 첫 번째 미션은 달성했으니 아직 기회가 있다. 이제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시간은 저절로 흐르고, 그동안 ‘나’는 또다시 바뀌어있을 것이다. 십 년 후 같은 책을 읽으며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그 학생보다 더 궁금한 서점원.


그래서 나는 요즘 책 읽는 습관에 작은 변화를 줬다. 원래 책을 엄청 깨끗하게 읽는 편인데 밑줄도 긋고 재밌는 문장엔 질문이나 답글도 달아본다. 2025년의 내가 느낀 감정을 2035년의 나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직관적으로 확인해 보고 싶어서.


그러고 보니 2035년에도 나는 여전히 서점원일까?



2025년 7월 22일 화요일

로또를 사진 않지만, 언젠가 로또에 당첨되면 세계문학전집을 구입하고 싶은 서점원




서점원의 문장과 책

: 우리가 처음으로 들은 아름다운 노래는 시간이 흘러도 아름답게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아름다움은 어디에나 있지만, 그보다 좋은 건 처음으로 아름다움을 발견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300개의 단상』 세라 망구소 지음, 서제인 옮김, 필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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