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가 끝난 뒤, 진짜 질문이 시작된다.
교사 시절,
나는 아이들이 충분히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부모들에게 당부하곤 했다.
“오늘은 물감놀이를 합니다. 더러워져도 괜찮은 옷을 입혀 보내주세요.”
그때는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인화한 뒤 부모에게 전달하던 시절이었다.
아이들의 놀이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여줄 수 없었기에,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물감 자국이 가득한 옷, 모래가 묻은 신발을 보면
부모도 아이가 잘 놀다 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아이들의 옷에 남은 물감 자국, 신발에 밴 모래의 흔적은
“오늘 참 잘 놀았구나”를 말해주는 언어라 믿었다.
아이들이 물감, 크레파스, 모래를 온몸에 묻히고 돌아오면
그 흔적들이 하루의 놀이를 증명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하원 시간,
몇몇 부모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교사가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목소리로
“옷이 왜 이래?” “다음엔 묻히지 말고 조심히 놀자.”
그 말은 아이에게 하는 듯했지만,
사실은 교사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작업복이나 앞치마를 입히자니 불편하다고 거부하는 아이들.
그렇다고 옷에 묻히게 둘 수 없는 현실.
그 사이에서 교사로서의 나도 점차 지쳐갔다.
나는 놀이 중 아이에게 점점 더 많은 말을 하게 되었다.
“기다리자.” “하지 말자.” “조심하자.”
아이들은 신이 나서 놀이를 시작하다가도
물감이 옷에 묻을까 봐 교사의 눈치를 보았다.
물감이 옷에 묻으면 울며 닦아달라고 하는 일도 늘어났다.
그러던 어느 날,
모래 놀이터에서 한 아이가 신발을 벗고 모래를 담기 시작했다.
신발을 트럭처럼 끌고 다니고, 발자국을 찍으며
신발에 모래를 담아 화분처럼 꾸미고, 풀도 꽂았다.
다른 친구들도 하나둘 따라 하기 시작했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생각했다.
‘그래, 이게 진짜 놀이지.’
아이들의 놀이를 응원하며 그 순간을 멈추지 않기로 했다.
너무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원 시간이 다가오자 내심 부모의 반응이 걱정됐다.
그러나 나는 아이들의 즐거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예상대로 몇몇 부모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신발이 왜 이래! 다음엔 조심해, 알았지?”
어떤 부모는 나에게 직접 말했다.
“모래장 갈 땐 좀 조심시켜 주세요.”
그런데,
그 틈에서 한 부모가 신발을 무심하게 툭툭 털며
아이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와, 오늘 모래놀이 했구나! 재밌었겠다. 무슨 놀이했어?”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조잘조잘 이야기를 풀어냈다.
“엄마, 내가 신발로 트럭도 만들고, 거기다 꽃도 꽂았어!”
나는 그 부모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놀이를 아이의 경험과 성장으로 바라보는 시선.
아이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부모.
‘이것이 부모다움 아닐까.’
그 시선이 아이를 지키고,
교사를 지지하며, 놀이를 온전히 만들어주는 것이다.
진짜 놀이는 놀이 그 자체보다도
그 놀이의 흔적을 품어줄 수 있는 어른이 있을 때 완성된다는 것을
나는 그 부모를 통해 다시금 깨달았다.
그날 이후,
나는 다시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오늘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놀이의 흔적을 안아주는
부모다움을 살아가고 있는가.
부모와 교사가 같은 언어로 놀이를 이야기할 수 있을 때,
아이들은 그 안에서 진짜 자신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