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은 참을 수 없지
우리 집은 종손집안이었다.
명절만 되면 그 사실이 집 안 구석구석에서 증명되었다.
평소에는 조용하던 대청마루가 친척들로 가득 차고, 부엌은 아침부터 밤까지 연기가 자욱했다.
추석이면 특히 더했다.
차례상을 차리기 위해 준비해야 할 음식이 끝이 없었고, 집안 어른들의 손길만으로는 감당이 안 될 만큼 일거리가 쏟아졌다.
잡채만 해도 그랬다. 빨간 고무다라이에 산더미처럼 쌓인 당면을 휘휘 저으며 양념을 하다가, 금세 동이 나면 또다시 50인분을 삶아야 했다.
그 커다란 다라이 속을 들여다보면, 내 어린 눈에는 잡채가 마치 하나의 호수처럼 보였다.
옆에서는 숙모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고기를 볶고, 당근을 채 썰고, 파를 다듬었다.
분주한 소리와 고소한 냄새가 한데 뒤섞여 집 안을 가득 채웠다.
나는 그 속에서 "고양이 손" 노릇을 했다. 바쁠 때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린다고들 하지 않나.
아직 서툰 나였지만, 엄마와 할머니는 내 손에 작은 일들을 맡겨 주었다.
맛살, 햄, 쪽파, 버섯, 단무지를 일정한 크기로 잘라 건네주면,
나는 그것들을 꼬치에 꿰어 바구니 가득 채워두었다.
잘못 꿰어 삐뚤빼뚤하게 만든 꼬치도 있었지만, 누구도 탓하지 않았다.
그저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고맙다며 웃어 주었다.
꼬치를 꿰는 중간중간 맛살이나 햄을 하나씩 몰래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가
물을 마시는 척, 식혜 한 컵을 마시면
몰래 먹는 짜릿함과 오랜만에 먹는 햄의 맛에 척추까지 찌릿했던 것 같다.
제사용 동그랑땡 반죽이 완성되면 내 차례가 또 왔다.
손바닥에 반죽을 동글납작하게 빚어 쟁반에 올려두면 엄마가 계란물에 퐁당 담가 주었다.
노릇노릇 부쳐지는 소리가 귀에 쏙쏙 들어왔다.
나는 내가 만든 동그랑땡이 제사상에 오른다는 사실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갓 구워진 고소하고 짭짤한 동그랑땡을 하나씩 맛보는 것도 큰 기쁨이었다.
(제사상에 올라가는 음식보다 내 입에 들어간 음식이 더 많았다는 사실은 비밀)
그리고 추석 하면 역시 송편이 빠질 수 없다.
밀가루처럼 보드라운 쌀가루 반죽을 할머니가 꺼내오면, 나는 그것을 동글동글 떼어내어 한쪽에 쌓아두는 일을 맡았다.
숙모들과 엄마, 할머니는 그 작은 덩어리에 동부, 콩, 깨, 밤을 넣어 꾹꾹 빚어내셨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했던 건 깨소였다.
잘 볶은 통깨에 설탕을 듬뿍 버무린 그 달콤고소한 맛은, 어린 나를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내가 그 깨소를 몰래 숟가락으로 퍼먹었다는 것이다.
엄마 눈치를 보며 살살 떠먹다 보니 그릇은 금세 바닥이 보였다.
결국 속이 모자라 버렸다.
나는 들킬까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할 수 없이 속이 비어 있는 송편을 몰래 찜기에 넣어버렸다.
다 만들고 난 뒤 송편을 찌면, 맛을 보라며 몇 개를 먼저 꺼내곤 했다.
그런데 그 속 빈 송편이 연달아 걸려 나오자 삼촌과 할아버지가 의아해하기 시작했다.
“이상하네, 왜 송편 속이 안 들었지?”
“설마 누가 장난친 거 아냐?”
곧바로 범인 색출 작업이 벌어졌다. 하지만 사실 작업이랄 것도 없었다.
그런 짓을 할 사람은 뻔히 정해져 있었으니까.
온 집안의 시선이 내게 쏠렸고, 나는 지레 겁을 먹고 얼어붙었다.
다행히도 친척들이 다 모여 있는 자리라 크게 혼이 나진 않았다.
엄마는 그저 날카로운 눈빛으로 한번 째려볼 뿐이었다.
나는 속으로 ‘휴, 다행이다’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송편과 얽힌 장난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송편을 먹을 때마다 안에 뭐가 들었을지 알 수 없으니, 나는 늘 손으로 살짝 갈라보곤 했다.
깨가 들어 있으면 얼른 입에 넣었지만, 콩이 들어 있으면 다시 슬쩍 돌려놓았다.
그 장난도 오래 가지 못했다. 결국 엄마에게 들켜 또 혼이 났다.
그래도 어린 마음에 송편 속이 주는 그 ‘도박 같은 두근거림’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깨가 최고!)
송편 빚을 때 할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예쁜 송편 빚으면 예쁜 딸 낳는다.”
어른들은 웃으며 맞장구쳤지만, 어린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래서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 엄마가 예쁜 송편 빚었었나봐요.”
순간 부엌은 폭소로 가득 찼다. 숙모들은 허리를 잡고 웃었고, 엄마는 얼굴이 벌개져서 나를 흘겨보았다.
나는 왜 다들 웃는지 몰랐지만,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왠지 모르게 뿌듯했다.
그렇게 우리 집 추석은 늘 부산하고, 떠들썩하고, 따뜻했다.
음식 냄새가 집안을 가득 메우고, 찜기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수증기 속에 사람들의 웃음이 흘러넘쳤다.
그 속에서 나는 어른들의 일손을 돕는 ‘고양이 손’이자, 송편 속을 슬쩍 탐하는 ‘작은 도둑’이었고,
때로는 엉뚱한 한마디로 모두를 웃게 하는 장난꾸러기였다.
지금은 다들 제각기 흩어져 살고, 명절 풍경도 많이 달라졌다.
가끔 송편을 사서 먹다 보면, 문득 어린 날의 추석이 떠오른다.
고소한 깨소가 씹히면, 몰래 숟가락을 들고 깨를 퍼먹던 내가 떠오르고, 콩이 씹히면 괜히 다시 내려놓고 싶어지던 장난이 생각난다. (콩 싫어!)
송편 하나에도 그 시절의 웃음과 따뜻함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추석은 그저 제사 지내고 음식을 나누는 날이 아니라, 온 가족이 모여 북적이고 웃었던 날로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아 있다.
예쁜 송편은 결국 빚지 못했어도, 그 안에 담긴 건 우리 집의 소란스러운 사랑이었다.
그 기억 덕분에 지금도 추석이 다가오면 마음 한쪽이 달콤하게 불어난다.
(지금은 추석 싫어!)
작렬하던 태양빛에 아이스크림처럼 내 몸까지도 녹아버릴 것 같던 여름이 어느새 지나고,
추석을 앞두고 있네요.
여러분께서는 추석 하면 떠오르는 추억이 있으신가요?
저희 부모님들은 아마도 싫으셨겠지만,
저는 조용하던 시골집에 친척들이 모이는 것 자체가 좋아서
명절이 되기 며칠 전부터 설레했던 기억이 있네요.
제사나 명절때만 먹을 수 있었던 맛있는 음식들도 좋았고요 (이게 목적이었을 수도 있어요!)
지역마다 명절 음식이 다르던데,
혹시 "우리 집 명절 음식 중 이것은 특별한 것 같다" 라는 것이 있다면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