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 익은 포도의 풋내가 넘쳐온다. 태양을 견디지 못한 포도는 밖으로 차단막을 치고 안으로 즙을 모은다. 여름의 와이너리는 초록의 포도가 영글어가는 싱그러움으로 가슴 벅찬 곳이다. 빈티지가 다양한 포도주를 시음하다 보면 안내하는 직원이 지역만의 토질과 기후, 맛을 음미하는 법을 설명해 준다. 남프랑스의 여름은 강렬하게 뜨겁다.
그럼에도 나는 겨울날의 와이너리를 좋아한다. 그곳에는 겨울을 나는 올리브 나무와 아직은 가능태로만 존재하는 앙상한 포도나무가 있다. 이 뼈마르고 건조한 포도 줄기가 이내 봄의 기운을 머금고, 연둣빛의 잎을 내어 줄 생각을 하면 가슴이 간질간질한다.
포도의 줄기가 무한으로 뻗어서, 푸름으로 덮일 일을 상상한다. 내 몽상은 이미 계절보다 한 발 앞서 나가, 가슴속에 설렘을 담는다. 봄을 기다리는 나무의 겨울눈처럼. 겨울의 포도밭은 고요에 감싸여 있고, 때때로 마을에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는 평화롭다. 포도는 흔적도 없고, 햇살의 영혼만 남은 포도주가 익는다.
방돌 지역의 도메인은, 와인의 정원으로 둘러싸인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마스터 도주가를 만나는 일은 겨울철 와이너리 방문의 행운이다. 그와 악수할 때, 그의 손은 두텁고, 크고, 굳은살이 박인 건강한 손이었다. 노동으로 단련된 거친 손은, 늙은 올리브 나무를 닮아 목가적인 느낌이 났다.
대여섯 병의 포도주를 맛보다 보면 그의 와인 부심은 절정에 달한다. 그의 설명은 상업적이지 않고 텁텁하지 않으며 맑았다.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 날, 한국인의 방문은 처음이라는 말로 호감을 대신한다. 옅은 미스트랄은 히끗한 머리칼을 가볍게 스치고 간다. 그가 북서의 바람을 안온하게 막아준다. 두어 병 추천받은 와인을 품에 안고 돌아온다. 취기를 동반한 뿌듯함이 스멀스멀 마음에 자리한다.
겨울날 포도나무는 여전히 봄을 기다린다. 기다림에서 진짜 맛이 농익는다. 한 잔 술에서 그들의 삶과 계절이 느껴질 때, 프랑스는 단순 여행지가 아니라, 사계절이 병입(甁入)되는 포도주의 땅으로 기억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