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히도 높았던 하늘
산들한 가을바람에 오색단풍이 춤을 추었다.
외곽에 자리한 몇 평 안 되는 밭을 가꾸느라 애경의 이마엔 송글한 땀이 맺혔다.
흙 묻은 손을 앞치마에 문지르다 문득 멈춰 바라본 하늘은 참 깊었고, 어쩐지 구름 한 점 없었다.
“아휴— 보통일이 아니네.”
밭일은 고되었지만, 씨앗이 새싹이 되어 열매를 맺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그녀에게 마음의 치유 같았다.
“어느새 이렇게 자랐네! 기특하기도 해라“
한숨 돌리며 그늘에 펴 놓은 돗자리로 향하자 그제야 요란한 전화벨소리가 애경의 귀에 닿았다.
“여보세요, 당신이 이 시간에 웬일이에요?” 한참 행사로 바쁠 인성의 전화가 한가로운 가을 낮의 평화를 깨뜨렸다.
“당신… 괜찮아?”
수화기 너머 인성의 목소리는 안부를 묻는 질문과 달리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
“응? 난 괜찮은데… 무슨 일 있어요?”
잠시 안도의 한숨을 몰아 쉰 인성이 말을 이었다.
“여보… 놀라지 말고 들어.”
“뭔데 그래요, 혹시 사고 났어요? “
“그게 아니고, 우리 공장에 불이 났다네. “
“불이라니? 불? 공장에? “
“그래. 지금 박사장한테 전화가 왔어.
당신 전화가 안 돼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내가 지금 출발할 테니, 당신 혼자 가지 말고 기다려. 사람만… 사람만 안 다쳤으면 된 거야. “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하늘은 무심히도 높았다.
날이 저물고야 도착한 그 곳엔 사이렌 소리와 사람들의 웅성임이 뒤엉켜 울렸고, 검은 연기가 치솟아 그 맑던 하늘을 덮었다.
“ㅇㅇ동 쇼파 공장에서 대형 화재 발생했습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화재로 건물은 전소되었고, 00원 규모의 재산피해가…“
뉴스 화면 속, 헬멧을 쓴 소방관 뒤로 시뻘건 불길만이 흔들리고 있었다. 애경은 끝내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주저앉았다.
“왜 이 모양이야. 이제 어떡하라고…” 그런 애경을 바라보며 인성도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바닥에 수북이 쌓인 잿더미만 무덤처럼 남아 있었다.
불이 난 뒤 며칠이 흘렀다. 시간은 하염없었지만, 부부의 시간은 멈추었다. 매일 공장에 들러 잿더미 위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아무 말 없이 돌아오는 날들의 반복이었다.
눈을 감으면 시뻘겋게 치솟는 불길에 쉽게 잠들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아니, 잘못된 게 맞기는 한 건지 생각은 같은 자리만 맴돌았다.
며칠이 지났을까, 지역 모임에서 친분이 두터웠던 전상무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인성, 자네 지금 집에 있나? “ 인성을 찾아온 전상무는 안부도, 괜찮냐는 말도 없었다. 침묵으로 소주잔만 몇 번이고 비워졌다.
“이 봐 인성이, 애들 아직 다 키운 거 아니잖아. 시집, 장가보내야지”
그 말에 인성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전상무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여기서 접으면, 자네 지금까지 한 거 전부 허공이야. 이 정도만 하려고 수십 년 버틴 거 아니잖아.”
그날 이후, 여기저기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고,
그 부담스러운 손길을 인성은 외면하기 힘들었다.
“힘든 거 알아. 그냥 받아. 다시 일어나서 꼭 갚아 “
“이대로 무너지면 안 되지. 은행에 아는 사람 있으니 만나봐. 말해뒀어 “
“얼마 안 되지만, 이걸로 중고라도 알아봐요 형님“
위로는 없었다.
‘우리가 다 해주겠다’는 말도 아니었다.
‘부족한 채로라도 시작해라 ‘고 말했다.
그 말들이 마음의 짐으로 얹혔지만, 그 짐을 한사코 짊어져야 했다.
숫자로는 적히지 않는 빚,
기한도, 만기일도 없는 약속들.
반드시 다시 일어서야만 갚을 수 있는 것들.
이제는
못 하겠다는 말이 아닌, 못 하면 안 되는 자리에 섰다.
삶이 나를 끝없이 무너뜨려도,
나는 끝내 다시 일어선다.
- 인성쇼파공장, 그 시절의 기록 -
내 부모님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실화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