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와 매일 소설을 구상하고 써 내려가며 여름 학기를 보내고 있었다. 주는 행복해 보였다. 얼굴에서 사라진 멍처럼 주의 마음에도 깨끗한 행복만이 가득해 보였다. 9월까지 마감인 k시 SF 공모전까지 찾고 나니 온과 주의 글쓰기는 속력이 붙기 시작했다. 다음 주면 다시 짧은 여름 방학이 시작된다. 그러고 일주일 뒤면 2학기가 시작된다. 학기가 시작되면 공부에 시간을 쏟느라 글을 쓸 여력은 없을 것이다. 2학기가 시작되기 전, 그러니까 9월이 시작되기 전에 글을 마치기로 했다. 완성까지 일주일이 남은 채 두 번째 여름 방학이 시작됐다. 방학이라기엔 여름 보충 수업에 지친 학생들을 위로할만한 짧은 휴식기간이었다. 주와 온은 매일 2시에 만나 글을 쓰자고 약속했다. 학교에 가지 않아도 주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주는 온에게 일상의 부분이 되었다. 그랬는데, 주가 온의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는데, 약속은 무참히도 지켜지지 않았다.
주와 연락이 되지 않은 지 3일째. 또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번에는 문자에도 답장을 하지 않는 주에게 온은 화가 났다. 온과 함께하기로 한 약속은 어디로 간 건지. 더 이상 주를 찾지 않기로 했다. 주에게 관심을 끄기로 했다. 마음은 그럴 수 없지만 그러기로 했다. 남은 4일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온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개학을 기다리고, 주를 기다렸을 뿐이다.
9월이 됐다. 주는 학교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담임선생님이 개학 첫날 조례를 마치고 온을 불렀다. 무슨 이유인지 알면서도 답답한 심정으로 교무실로 따라갔다. 주와 연락이 안 된다며 가장 친한 온을 찾은 것이었고, 온은 모르겠다 답했다. 정말 몰랐다. 주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아직도 화가 많이 났지만 학교까지 나오지 않는 주가 걱정 돼 담임 선생님의 말대로 주를 찾아갔다.
며칠 동안 주의 집을 찾아갔지만, 주의 아버지 목소리만 들을 수 있을 뿐 주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괜한 배신감이 들어 주의 집 복도 소화전을 쿵 찼다. 그제야 아버지는 문을 열고 온을 바라봤고, 온은 주의 행방을 묻는 대신 도망쳤다. 그는 너무나도 멀쩡해 보였다. 주는 집에 있을 것이다.
“분리수거 좀 하고 와라.” 엄마의 말에도 온은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을 안 했다. 설거지를 마친 엄마가 온의 방에 찾아와 이름을 부를 때까지 온은 핸드폰만 바라보며 주를 생각했다. “하루 종일 그러고 있니, 공부를 하든 방 청소를 하든 움직여라, 좀.” 엄마의 잔소리가 시작되자 서둘러 옷을 입고 분리수거할 쓰레기를 챙겨 들었다. 문밖을 나서니 복도 창문으로 빗소리가 쏴- 들렸다. 방에도 창문은 있는데, 온은 생각했다. 집에서 우산을 챙겨 다시 나오니 빗소리가 더 세차게 들렸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고 아파트 현관까지 가자 익숙한 교복이 보였다. 아직 더위가 채 가시지 않았지만 여전히 동복을 입은 아이, 주가 현관에 앉아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 여기서 뭐 해? 왜 연락이 안 됐어?” 들고 있던 쓰레기를 바닥에 놓고 온은 주에게 다그쳤다. 주는 웃었다. 학교에 가기 싫어 일부러 연락을 피했다고 답하는 주는 웃고 있었다. 비를 맞았는지 머리부터 신발까지 다 젖었지만 떨고 있지는 않았다. 주는 떨고 있지 않았다. 속눈썹부터 동공까지, 주의 표정은 어색했다. “어디 가?” 온을 기다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는 온을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대했다. 그제야 온은 쓰레기를 다시 손에 들어 보여줬다. “같이 가.” 갈 길 잃은 강아지처럼 주는 온을 따라왔다. 비좁은 우산에 둘이서 꼭 붙은 채 어쩌면 더러울지 모를 쓰레기를 함께 분류했다. 마지막 플라스틱 쓰레기를 버리고 주는 온에게 돌아서 말했다. “들어가지 마.”
아파트 뒤쪽 놀이터 정자에도 물은 고여있었다. 평소에 햇빛을 막아주는 지붕도 세찬 비를 막아주진 못했다. 긴 머리칼을 탈탈 터는 주를 온은 가만히 바라봤다. 주는 온의 눈길을 피하고 있었다. “어디에 있었어?” “가출했어.” 주는 웃었다. “학교 가기 싫어서 가출해 버렸어.” “거짓말.” 주는 집에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주의 아버지가 아는 곳에 있었을 것이다. “내가 왜 거짓말을 하냐.” 주는 바닥에 떨어진 여름꽃을 주워 물기를 털어냈다. 아무리 털어내도 주에게서 나오는 물기에 꽃잎은 마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심히 닦은 꽃을 온의 귀에 꽂았다. 온의 귀에 살며시 꽂자 주와 가까워진 온은 긴장했다. 그때 보인 주의 셔츠 안이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주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주는 집에 있었고, 아버지가 있는 그곳에 있었고, 주는 괜찮지 않았다. 그동안 주가 왜 동복을 입었는지, 왜 집에 초대하지 않았는지, 왜 가출했다고 거짓말했는지 모든 걸 알아버림과 동시에 온은 죄책감을 느꼈다. 소중한 주의 고통을 알지 못했던 온에게 주는 줄 수 있는 가장 아쉬운 것을 주었다. 물에 젖어 시들지도 다시 피어나지도 못하는 꽃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