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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셋, 한참 회사 다닐 나이에 퇴사를 하다.

by 서른리셋

“퇴직금이 정상적으로 입금되었습니다.”

문자가 울렸다. 드디어 자유다!

이제 더는 아침 9시에 억지로 출근하지 않아도 되고,

눈치 보며 맞춰야 했던 하루들끝이다.

늦잠 자고, 브런치 먹고, 틈만 나면 여행을 가는 꿈같은 일상의 시작이었다.
‘퇴직금도 받았겠다조금만 쉬다가

다시 이직하면 되겠지.’

퇴사하던 해, 내 나이는 서른셋이었다.

누구보다 한창 일할 시기였고,

나름 10년 넘게 성실하게 버텨온 커리어도 있었다.

하지만 몸은 이미 오래전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그동안 주말 출근도 하고, 일이 바쁘면 야근도 했다.

그렇게 쌓인 피로가 결국

갑작스러운 하혈로 터져 나왔다.

놀라 급히 병원을 찾았고, 의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초기 유산과 비슷한 상태입니다.

최근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나요?”

그동안 내 몸은 사실 무너지고 있었다.

더는 괜찮지 않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퇴사를 하고 며칠 동안은

병원을 다니며 푹 쉬었다.

아침에 억지로 일어나지 않아도 되고,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을 수 있었고,

오랜만에 온전히 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숨을 고르고 나니 다시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직을 준비해야 했다.

나는 10년 넘게 보육교사 말고

다른 일을 해본 적이 없었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은 자리가 자주 나는 편이라

이직은 비교적 쉬운 쪽에 속한다.

마침 어린이집 원장으로 와달라는 제안도 있었고,

이제는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만 남아 있었다.

이직을 준비하며 평소처럼 지내던 어느 날,

뉴스에서 소식이 들려왔다.


‘올해 대한민국 출생률 최저 하락 0.75명.’

‘전국 어린이집과 유치원 보육시설 폐원 증가!’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에이, 설마. 그저 뉴스일 뿐이고,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겠지.

그렇게 애써 넘기며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

산책을 나섰다.

곧바로 두 번째 충격을 받았다.

‘어린이집 폐원합니다. 노인요양원 임대 환영.’

뉴스에서만 보던 변화가 내 눈앞의 현실로 다가왔다.

집 근처 어린이집도 폐원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줄고 있었고,

그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어느새 세상이 바뀌고 있었다.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지탱해주던 일이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머리가 멍해졌다.

내가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고,

아직 살아갈 날은 많은데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불안은 나를 덮치고,

결국 우울이 되어 나를 집어삼켰다.


그날은 단풍이 붉게 물들고,

은행잎은 노랗게 흩날렸다.

나뭇잎도 계절이 오면 제 색을 냈다.

그런데 나는 아무 색도 내지 못한 채 멈춰 있었다.

일도 하지 않고, 할 일도 없고,

할 수 있는 일조차 없는 상태.

그게 계속되자 나 자신이 점점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마치 세상은 다 제 몫을 하며 돌아가는데,

나만 역할 없이 남겨진 기분이었다.

“나는 끝났어.”

그 문장은 나를 하루 종일 따라다녔다.

매일 밤, 잠들기 전 눈을 감으며 조용히 기도했다.


“제발, 내일이 오지 않게 해주세요.”

그 소원이 이루어진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아침 햇살이 창으로 스며들면,

나는 다시 몸을 말고 이불 속에서 조용히 울었다.

서른셋, 나는 그렇게 일도, 건강도,

그리고 나라는 사람까지

어느하나 빠짐없이 완벽하게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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