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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의 문법: 후각으로부터의 작문

후각적 사유의 구조

이 글은 후각적 감각을 통해 문체의 구조를 탐색하는 시도이며, 문학적 묘사보다는 감각의 인식론에 가깝다.




나는 냄새로 기억하고, 향으로 생각하고, 공기의 농도로 글을 쓴다.

쥐스킨트의 『향수』를 처음 읽던 12살의 나를 떠올린다. 나는 ‘문장보다 냄새를 믿는 인간’으로 태어났다. 나는 단어의 모양보다 향의 움직임을 먼저 이해했다.

(I was born then as "a human being who trusts scent more than the sentence." I understood the movement of fragrance before I understood the shape of the word.)


문장을 쓸 때마다 머릿속에는 문법 대신 공기의 흐름이 있었다.


열두 살의 내 방에는 늘 비누 거품이 터진 뒤의 공기가 맴돌았다. 그 공기는 사라지는 여름의 냄새였다.

라탄 바구니 안에 담긴 무화과와 몇 마리의 뱀을 연상시키는, 달콤하고 축축하며 조금은 불안한 향기. 나는 그 공기 속에서 자라났다. 책을 읽는다는 건 냄새를 맡는 일이었고, 생각한다는 것은 향의 방향을 쫓는 일이었다.


빛 한 줄이 비스듬히 스며드는 방, 공기가 가라앉고 냄새가 떠다니는 순간.



쥐스킨트의 광장, 그리고 나의 공기

그 무렵 나는 쥐스킨트의 『향수』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머리카락 신에서 처음 전율을 느꼈다. 그르누이가 여인의 향을 채취하던 그 장면. 나는 잔혹함보다 더한 순수의 광기를 보았다. 그것은 욕망이 아니라 추출(Extraction)이었다. 그에게 여자의 육체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그 육체가 풍기는 완벽히 응축된 향기의 원천만이 중요할 뿐이다.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찰나에 그 냄새를 붙잡으려는 인간의 몸부림.

그 전율은 단순히 잔혹한 감각이 아니라, 존재의 가장 순수한 잔해를 수확하려는 외과적 집착에 가까웠다.


그리고 마지막, 광장 신. 그르누이는 완벽한 향을 만들어냈고, 사람들은 그 향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이내 깨달았다. 그가 갈망했던 것은 애착이 아니었다. 지배나 권력욕도 아니었다. 그가 원한 것은 존재가 증발하는 순간의 절대적인 평화 — 개인이 소멸하고, 오직 향만 맴도는 고요함이다.

그것은 잔혹함이 아니라, 존재가 증발하는 순간의 가장 차갑고 완벽한 아름다움이었다. 인간의 자아가 사라지고 오직 형상(Form)만이 순수한 기하학으로 남는 순간.


나는 책을 덮었다. 그 장면을 읽는 일은 견디는 일이었고, 향은 그 견딤의 끝에 남았다.

나는 문장을 향으로 정제한다. 문장은 나에게 결국, 한 장면의 냄새를 마지막까지 붙잡아 기억이라는 시스템에 강제로 기록하려는 시도다. 누군가의 말투, 방 안의 온도, 대화 후 남은 공기의 밀도 — 그 모든 것이 향이 되어 내 문장에 스며든다. 내 글의 독자들은 문장을 읽기보다 향을 맡는다. 그것은 나의 세계를 가장 정확히 이해하는 방식이다.

비누 거품이 터진 직후의 공기. 투명한 물방울과 햇빛이 뒤섞인 여름의 오후.

잔향으로 남는 글: 오이 향 로션의 쉼표


글을 쓴다는 건 사라지는 것의 냄새를 기록하는 일이다.

단어가 증발한 자리에서 남는 건 언제나 미세한 향의 입자다.

나는 그 입자들을 모아 하루의 감정을 기록한다.


이 기록의 과정에는 쉼표가 필요하다. 지금 내 몸을 감싸는 에르메스 바디 샤워의 깨끗한 비누 향은 글의 시작과 끝을 구분하는 단정한 여백이 된다. 나의 임상적 직업에서는, 나는 진단과 정밀한 분류 체계를 위한 언어를 사용한다; 글쓰기에서는, 나는 반대를 추구한다.



그 위에 얇게 겹쳐지는 오이 향 로션은 문장에 호흡할 여운을 만들어준다. 이 오이 향은 서두르지 않는, 차가우면서도 수분이 가득한 미니멀리즘이다.

그것은 내 문장이 너무 감정적으로 흐르거나 과도하게 분석적으로 치닫는 것을 막아준다.

단어 사이의 쉼표이자, 문장이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기 위해 잠시 멈추어 공기의 밀도를 재조정하는 후각적 정지(Scented Caesura)이다.




향으로 유발되는 글은 문법적 긴장이 아니라 후각적 정돈으로 통제된다.


글이 끝난 자리에는 종이 냄새가 남고, 그 위에 얇게 겹쳐지는 것은 나의 체온이 섞인 체취이다. 내 글은 언제나 잔향으로만 남는다.


그러나 그 잔향은 내가 세상에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형태다. 나는 후각에 의존한 글을 쓰는 사람이다. 내 문장은 사라지기 위해 태어나지만, 그 사라짐이야말로 내가 존재했다는 가장 순수한 냄새다.

(Yet, that lingering trace is the only form through which I can connect to the world. I am a person who writes dependent on olfaction.

My sentences are born to vanish. Their vanishing is the purest evidence of my having exis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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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