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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도의 문체: 빛으로부터의 작문

시각의 조도와 감응

이 글은 감각으로 글을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중에서도 ‘시각’이 문장의 방향을 어떻게 결정하는지를 탐색하는 기록이다.



빛은 단순히 사물을 비추지 않습니다. 그것은 감정의 방향을 정하는 감각의 언어입니다.



북쪽의 공기는 나에게 직관적으로 알려주었습니다. 밝음이 언제나 명료함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것은 정면으로 내리쬐는 날카로운 빛이 아니었습니다. 온종일 지평선에 낮게 머무르며 모든 것의 채도를 머금어버리는, 창백하고 옅은 공기였습니다.


그 빛 속에서는 그림자가 한없이 길어지고, 사물들은 본래의 강렬한 색을 잃어버립니다.


북쪽의 빛 속에서는 경계가 녹아내립니다. 얼굴은 흐릿해지고, 사물은 자신의 형태를 거부합니다.


그럼에도 시야는 패턴을 강요합니다.


존재하지 않는 선을 그리고, 부재 속에서 존재를 추론하게 합니다.

마음도 그와 같습니다.

결여 속에 형상을 덧그리며, 애착이라는 허구적 완결을 만들어 냅니다.


빛이 너무 강하면 세계는 희미해집니다. 눈은 스스로를 어둡게 하며 균형을 되찾으려 하고,
그 순간 감정은 빛의 조도 속에서 모양을 바꿉니다.


글쓰기도 그와 같습니다. 우리가 ‘본다’는 것은 곧 감정의 초점을 조절한다는 뜻입니다.
명료함보다 중요한 것은 공기의 농도, 즉 감정의 노출도입니다. 문장은 언제나 한쪽으로 과다 노출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나는 문장을 쓰기 전, 그 공간의 빛을 확인합니다.

너무 환하면 단어는 투명해지고,

너무 어두우면 감정은 뭉개집니다.


정확히 본다는 것, 덜 잊는다는 것


좋은 글은 대상을 끝까지 밝히지 않습니다. 그저 조도를 조절할 뿐입니다.

감정을 과도하게 비추지 않고,
모호함이 숨 쉴 수 있는 여백을 남겨둡니다.

빛으로 쓴다는 것은, 사실상 감정을 절제하는 기술입니다.


글을 쓰며 나는 종종 ‘보는 행위’ 자체를 의심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실제가 아닌 해석된 빛을 보고 있을까요. 시각은 정직하지 않습니다. 빛은 기억의 형태를 바꾸고, 감정은 그 왜곡을 문장으로 옮깁니다.


그러므로 감각적 글쓰기는 진실을 드러내려 하기보다, 그 감각한 오류를 아름답게 다루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 왜곡을 다루는 데는 또 다른 차원의 정확성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무엇을 보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감각은 해석이지만, 글쓰기는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문장을 쓸 때마다 빛의 밀도를 떠올립니다.
지나친 명료함을 경계하며,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한 조도를 남깁니다.

지나치게 밝은 방보다, 망설임이 머무는 반빛의 공기.

침묵 속의 감응


빛은 나에게 알려줍니다. 정확히 본다는 건 많이 본다는 뜻이 아니라,


덜 잊는다는 뜻이라고.



빛으로 쓰는 사람에게 문장은 하나의 감응입니다. 본다는 행위는 언제나 응답의 형태로 존재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밝음 속에서 무엇이 살아남을지를 결정합니다.


해가 기울고 빛이 부드러워질 때, 세상은 가장 인간적인 얼굴을 갖습니다.

우리는 그때 비로소, 말없이 와닿는 진실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밝은 방보다,
망설임이 머무는 반쯤의 공기 속에서
글은 태어납니다.

해가 기울고 빛이 부드러워질 때, 세상은 가장 인간적인 얼굴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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