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의 풍경 26

첫 조카 1: 엉뚱하고 따스한 시간들

by 도린

1. 4.6kg의 신기록


첫 조카는 내가 국민학교 5학년 때 태어났다.

무려 4.6kg, 병원 신기록으로 세상에 나온 자연분만의 쾌거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니, 퉁퉁 부어 얼굴이 뭉개진 큰언니 옆에

외계 생명체 같은 아기가 콜콜 잠들어 있었다.

머리 길이에서 발끝까지, 비례가 똑같아 마치 ET 같았다.

아기가 워낙 커서 겸자로 얼마나 당겼던지, 머리 옆에는 자국까지 선명했다.


도저히 예쁘다고는 할 수 없는 고귀한 생명체.

그런데 요 녀석, 지 엄마를 닮지 않고 이모인 나를 닮았다.

막 태어난 조카 얼굴에서 내 얼굴을 발견하다니,

그때부터 알 수 없는 끌림과 정이 남다르게 깊어지기 시작했다.




2. 서언(서원) 하다 vs 시언 (시원) 하다


친정집에 언니와 조카가 와서 온 가족이 함께 밥을 먹던 날이었다.

조카가 식탁에서 한 마디 거들었다.


> “하부지, 뜨거운 국 드실 땐 ‘서언하다’ 하시야 되고,

차가운 오이냉국 잡수실 땐 ‘시언하다’ 하시야 돼요.”


온 가족이 배를 잡고 웃었다.

어릴 때부터 미각적 표현이 뛰어났던 녀석이

지금은 몬도가네 수준으로, 못 먹는 게 없다.

그 말투와 자신감만으로도 식탁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3.린스로 세발자전거 닦기


샴푸도 귀하던 시절, 언니가 특별히 린스를 사다 주었다. 그런데 글쎄,

조카가 몰래 세발자전거를 닦으면서 그 귀한 린스를 다 써버린 걸 보고,

한 번도 써보지 못한 린스가 아까워 혼내려고 했다.


조카의 변명 한번 거창하다.


> “샴푸가 썩은 줄 알고, 버리기 아까버서 자전거 닦았으-"


본시부터 엉뚱했던 녀석, 세발자전거를 닦는 데 머리감을 때 쓰는 귀한 린스를 소진하다니,





4. 여름성경학교의 음치


여름성경학교, 나는 어린이부 선생으로 피아노 반주에 맞춰 신나게 주제곡을 가르쳤다.

몇 번을 반복한 뒤, 용기 있게 주제가를 불러볼 학생을 찾았다.


벌떡, 조카가 마이크를 잡았다.

아뿔싸, 태생적으로 음을 다스릴 줄 아는 ‘음치’에

데시벨 최상의 목소리였다.


순식간에 모여든 아이들 모두, 조카의 파워풀한 선창에 맞춰

엉망진창 난장판 주제곡을 합창하고 말았다.

웃음과 당혹감이 뒤섞였지만, 조카의 천진난만함과 과감한 용기에 앵콜~~




5. 오늘의 양식


어느 날, 출출하다고 조카가 이모인 나에게 맛난 걸 만들어 달라고 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책꽂이에 있는 요리책을 가져오라 했더니,

내민 것은 《오늘의 양식》, 성경 말씀 묵상집이었다.


요리책 대신 묵상집을 가져온 엉뚱함에, 우리는 배보다 웃음이 먼저 차올랐다.

그날의 요리는 '마태볶음'? ㅎㅎ




6. 조카 찬스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세월의 무상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조카와 나, 서로서로 나이를 먹어가는 처지, 하지만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천진난만하다.

이제는 친구처럼 더 친밀해졌고,

여러모로 ‘조카 찬스’를 남발하며 이모인 내게 극진하다.


어릴 적 샴푸로 세발자전거를 닦던 장난,

여름성경학교 주제가로 난장판을 만들던 목소리, 묵상집으로 요리책을 대신한 엉뚱함까지

작은 장난과 엉뚱한 선택 속에서 함께 웃고 정다웠던 시간들,

그 모든 순간이 추억 속 달콤한 양념처럼

우리 곁에 남아 있다.



7. 씨유 수운!


조카야,

이모 며칠만 지나면 한국 간다.

딱 기다려!

이번에도 좋은 추억 많이 만들자.

그동안 함께한 웃음과 엉뚱함, 달콤한 기억들,

모두 마음속에 고이 담아 갈게.


마음껏 조카 찬스를 발휘해 주렴.


씨유 수운!


조카의 애완용 말 '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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