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약속 시간에 늦은 적이 있습니다.
출발할 땐 그리 늦지 않았다 생각했는데, 모든 상황이 저를 도와주지 않는 그런 날이었을 겁니다.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이미 제 마음은 그림자를 앞질러 갈 정도로 말이죠.
그러자 세상 모두가 적으로 변했습니다.
차의 시동을 거는 그 순간부터 싸움은 시작된 겁니다.
내 앞에 있는 모든 차들은 저의 약속을 방해하는 악당들이었습니다.
더더군다나 방향 지시등도 없이 끼어드는 차들은 마음속 저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분노를 기어이 깨우고 말았습니다.
혈압이 오르고, 온갖 욕을 허공에 날렸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았고, 몸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더불어, 모든 신호등은 저를 시험에 들게 했습니다.
갈길 급한 사람에게 신호등은, 특히 그 붉은 등은 형벌과도 같습니다.
평소보다 더 많이, 그리고 자주 걸리는 야속한 빨간 불.
신이 있다면 나에게 이럴 수 없을 거란 푸념마저 늘어놓게 되었습니다.
기어이 약속 장소에 도착한 저는 만신창이였습니다.
끼어든 차는 듣지도 못할 욕을 해대느라, 조급하게 두근 거리는 심박수를 온몸으로 감당하느라 하루 전체의 에너지를 다 쓴 것 같았습니다. 화를 내거나 욕을 하면, 가장 먼저 그것들을 받는 게 나란 걸 잊어버리고 만 겁니다.
그런데, 허겁지겁 약속 장소에 도착한 뒤 만나기로 한 상대방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길이 많이 막혀 좀 늦을 것 같다고 말이죠.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내가 양산해 낸 세상의 적들을 떠올리며 어리석은 나 자신을 마주했습니다.
약속 장소에까지 오는 동안, 내가 만난 수많은 적은 누구도 아닌 내가 만들어낸 겁니다.
내가 뱉은 욕과 화 그리고 원망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습니다. 알고 봤더니, 모든 분노의 화살 끝은 나를 향해 있던 겁니다.
갑자기 엘라 윌콕스의 '고독'이란 시가 떠올랐습니다.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
온몸이 오싹해졌습니다.
가뜩이나 살기 힘든 세상, 혼자서 온 세상을 상대했다고 생각하니 무서움이 몰려왔습니다. 동시에, 어리석으면서도 가련한 제 자신과 마주했습니다.
감정과 기분에 기반하여, 세상을 적으로 만들지 말아야겠습니다.
남 탓, 세상 탓하기 전에 나를 돌아보는 것.
그리하여 어떻게 하면 나를 지켜낼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세상을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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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안내] '무질서한 삶의 추세를 바꾸는, 생산자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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