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Stuck in a Ditch (1)

12달러짜리 딸기를 향한 질주, 그 처참한 결말

by 유지니안

2025년 여름, 무더운 햇볕 아래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지고, 귓가에는 그날의 '덜컹' 소리가 들려우는 듯하다.

미국 생활 2년차, 나름 운전에 자신감이 붙었다고 생각했던 5월의 어느 화요일.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시간에 쫓기고 있었고, 역시나 사고는 '급하게'라는 단어와 함께 찾아왔다.





사건 1주일 전.

Katy 할머니 집에서 미국의 홈 베이킹을 전수받고 있는 와중이었다.

"요새 딸기가 참 맛있어."

데이비스에서 평생을 살아 온 그녀, 이 동네의 숨은 맛집부터 싸고 좋은 가게까지 모르는 게 없는 살아있는 구글맵이었다.

"주로 어디서 사세요? 코스트코에서 사면 금방 상하던데요... Trader Joe's는 맛이 없구요."

내가 묻자 그녀는 특유의 명료한 말투로 답했다.

"옆에 딸기 농장이 있어. 중국인이 하는 것 같던데 거기가 제일 맛있더라."

"아 진짜요? 어디예요?"

"우드랜드 코스트코 가는 길에, 반대편에 있어. 딸기 이야기가 나온 김에, 다음 주에는 딸기 파이를 해보자."




사건 당일, 화요일 아침 9시.

엘리를 DPNS에 데려다주고 나서 시계를 봤다. 11시 50분까지는 픽업하러 돌아와야 하니까 정확히 2시간 50분. 코스트코 쇼핑에 30분, 왕복 운전 40분, 주차까지 하려면... 게다가 아무래도 땅덩어리가 넓은 미국인 만큼, 조금 더 넉넉하게 일정을 짜야했다. 평소라면 충분한 시간이지만 오늘은 딸기 농장까지 들려야 했기에, 아무래도 시간이 빠듯해 보였다.


코스트코에서는 말 그대로 '스피드런'을 했다. 고기 코너에서는 남편이 좋아하는 삼겹살과 엘리가 좋아하는 Ribeye Cap을 고르고, 김치는... 지난 여름에 이상하게 맛이 없어졌으니까, 이번에는 여름이 오기 전에 미리 넉넉하게 세 통 사기로 결정. 남편이 좋아하는 탄산수에, 이번주에 세일 들어간 휴지도 구매. 엘리 도시락용 스낵은 goldfish하고 Weltch's 젤리로 결정.

그렇게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계산대를 통과했다. 차에 짐을 싣고 운전석에 앉아 시계를 확인하니 벌써 11시다.

'아니 뭘 했다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담. 이번 주 금요일에 Katy 할머니하고 딸기파이 만들기로 했는데...'


오늘 꼭 딸기를 사야겠다는 마음으로 다급하게 운전대를 잡았다. 우드랜드에서 데이비스로 돌아오는 113번 도로를 질주했다. 데이비스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이고, 그대로 오른쪽으로 들어가 West Davis를 스쳐갔다. 조금 더 가다보니 반대쪽 차선 왼쪽에 Katy 할머니가 말한 딸기 농장이 보였다.

반대편 차선을 확인하니 하필이면 저 멀리서 큰 트럭이 달려오고 있었다.

'트럭 지나갈 때 까지 기다려야 하나? 근데 시간이 너무 없는데...'

에라 모르겠다.

"빨리 가자!"

액셀을 밟고 급하게 핸들을 돌렸다. 농장 입구를 향해 대각선으로 질러가는 순간.


덜-컹----! 쿠드드드득! 콰드드드득!

너무 놀라고 경황이 없어서 찍어놓은 사고현장이 없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파악조차 되지 않았다.

일단 차는 움직이고 있었고, 나는 본능적으로 농장 입구로 차를 몰았다. 하지만 차 밑에서 '드르르르륵' 하는 불길한 소리가 계속 들렸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뒤를 돌아봤다. 그제야 상황이 파악됐다. 농장 입구 옆에는 깊이 50cm 정도의 배수로(ditch)가 있었고, 내 차는 그 도랑을 정면으로 들이받았다가 기적적으로 다시 올라온 것이었다.

'만약 우리 RAV4가 SUV가 아니었다면...'

세단이었다면 차체가 도랑에 걸려 꼼짝도 못했을 것이다. 차고가 높은 SUV였기에 도랑을 타고 다시 올라올 수 있었던 것.


'뭔가 손상된 거 같은데...'

걱정스런 마음 가득히 차 밑을 들여다봤지만, 자동차에 대해 '기름 넣는 곳' 정도만 아는 내가 뭘 알겠는가. 이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남편. King Hall 도서관에서 공부 중이던 남편에게 바로 전화했다.

"여보... 나 차 사고났어..."

"뭐? 무슨 사고? 많이 다쳤어?"

"아니 다친 건 아니고, 유턴하다가 도랑에 빠졌다가 나왔는데 차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

보험사를 부르자는 남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미국에서 보험사를 부르면 최소 1-2시간. 엘리 픽업 시간까지 30분밖에 안 남았다.


일단 전화를 끊고 소리의 원인을 찾아봤다. 조금 더 살펴보니 오른쪽 앞바퀴 위쪽의 휀더 라이너(바퀴에서 튀는 흙과 자갈을 막아주는 부직포 같은 부품)가 찢어져서 바퀴에 걸려 있었다. 이대로는 운전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

맨손으로 찢어진 부분을 떼어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농장 직원에게 가위라도 있냐고 물었지만 "Sorry, I don't know"만 반복했다.

'하... DPNS에 늦겠다...'

어쩔 수 없이 Whatsapp 학부모방에 사고가 나서 늦는다고 이야기해 두었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도는 느낌이었다. 진짜 딸기 하나 사러 왔다가 별 일을 다 겪는다 싶었다.


그때, 신체가 건장한 라티노 남자 한 분이 다가왔다.

"도움이 필요한가요?"

마치 천사를 본 기분이었다. 그는 뜯어진 휀더 라이너를 보더니, 트럭에서 만능 칼을 꺼내더니 능숙하게 찢어진 휀더 라이너를 잘라냈다. 그러고는 조금 고민하더니, 이번에는 트럭에서 드라이버를 꺼내와 차체에 붙어 있던 나머지 부분도 깔끔하게 제거했다. 이 모든걸 하기까지 단 5분도 안 걸렸다.

"혹시 뭐 하시는 분이세요? 너무 대단하세요!"

"아... 저는 plumber에요. 이제 운전해도 되는데, 빨리 수리점에 가서 새걸로 교체하는게 좋을 것 같아요."

연신 감사 인사를 하는 사이, 그는 이미 딸기 두 박스를 사서 트럭에 싣고 있었다. 나도 부랴부랴 딸기를 샀다. 4파운드에 $12. 확실히 코스트코보다 싸고 신선했다. 무엇보다 그 달콤한 과즙이란... 소개해준 Katy 할머니도 줄 겸, 넉넉하게 4상자를 구매했다.




DPNS에 도착하니 벌써 12시 30분. Teacher Becky는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엘리를 데려왔다.

"Mommy was in a little accident, but she's okay now!"

엘리는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다른 아이들은 다 부모들이 데리러 왔는데, 엄마만 늦게 와서 걱정이 많았나보다.


집에 돌아와서야 엘리는 겨우 울음을 그쳤다. 나는 허겁지겁 가장 빨갛고 예쁜 딸기 하나를 씻어서 엘리에게 건넸다. 엘리는 눈물이 채 마르지 않은 얼굴로 딸기를 한입 베어 물더니,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엄마, 딸기 너무 맛있어."

그 한마디에 참고 있던 안도의 한숨이 터져나왔다. 아찔했던 사고의 순간, 낯선 이의 친절, 그리고 딸아이의 불안한 눈물까지. 그 모든 맛이 뒤섞인 딸기는 이상하게도 정말 달았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미국 생활의 맛일지도 모른다. 아슬아슬한 고생 끝에 찾아오는 작고 소중한 달콤함. 그날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짜고도 단 딸기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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