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장 공사 때문에 제대로 쉴 곳 하나 없던 우리들
그렇다. 우리 가족은 코로나에 걸렸다.
2020년, 전 세계가 멈춰 섰을 때도 피해갔던 코로나. 한국에서 마스크 대란이 일어났을 때도, 미국이 하루 사망자 수천 명을 기록할 때도 무사했던 우리였는데... 오히려 모두가 "엔데믹"을 외치던 시점에서 코로나에 걸리다니, 그런 아이러니가 또 없었다.
시작은 엘리의 콧물이었다.
데이비스의 4월은 원래 따뜻해야 정상이다. 작년만 해도 2월부터 반팔을 입었는데, 올해는 달랐다. 4월 초까지도 비가 내리고 쌀쌀했다. 게다가 봄의 데이비스는 송화가루 지옥이다. 도시 전체를 뒤덮는 노란 가루. 나는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송화가루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알았다. 밖에만 나가면 콧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눈은 토끼처럼 빨갛게 충혈됐다.
"엘리도 나 닮아서 알레르기인가 봐."
DPNS 아이들 절반이 콧물을 달고 살았다. 선생님도 "봄철엔 다들 그래요" 했다.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지르텍이나 클라리틴을 먹었다. 열도 없고, 기침도 안 하고, 그냥 콧물만 줄줄. 감기가 아니면 알레르기지, 뭐.
그런데 3일 후, 나와 남편이 동시에 쓰러졌다.
39도를 넘나드는 고열. 타이레놀을 먹어도, 애드빌을 먹어도 데이퀼을 먹어도 나이퀼을 먹어도..
열은 떨어지지 않았다. 온몸이 망치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침대에서 일어날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엄마! 배고파!"
콧물을 줄줄 흘리던 엘리는 어느덧 멀쩡해졌다. 아니, 오히려 예전보다 더 팔팔해졌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둘 다 못 일어나니 DPNS에 보낼 수도 없었다. Duty day는 급하게 다른 부모에게 부탁했다. 4월 말에 대신 해주기로 약속하고. 채팅창에 "So sorry for the last minute request..."를 몇 번이나 썼는지 모른다.
"이거... 코로나 아니야?"
붙박이장을 뒤지니 무료로 받은 검사 키트가 나왔다.
하... 두 줄. 선명한 두 줄. 100% 코로나 확진.
그런데 정말, 정말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드르르르륵— 쿵! 탁탁탁!
천장 공사는 계속됐다. 드릴 소리가 열로 달아오른 머리를 더 지끈거리게 했다. 천장에서 하얀 가루(아마도 페인트 가루였던 것 같다)가 떨어질 때마다 기침이 나왔다.
"으으... 집에서 쉬고 싶은데..."
도저히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공사 소음에 먼지까지. 무엇보다도 아픈 몸으로 엘리를 돌볼 여력은 없었다. 결국 우리가 선택한 건...
"엘리야, 코코멜론 볼까?"
죄책감? 그런 것을 느낄 여유도 없었다. 생존이 우선이었다.
3일째 되던 날, 열은 조금씩 내렸지만 새로운 증상이 시작됐다. 초록색 가래. 정말 '초록색'이었다. 내 몸에서 이런 색이 나왔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지만, 진짜 풀잎처럼 진한 초록색이었다.
"이게 정상이야?"
남편이 CVS에서 Mucinex를 사 왔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한국이었다면 병원에 갔겠지만, 여기선 예약하는 것도 일이다. 아무리 빠르게 예약을 잡아도 1주일 뒤. 이미 병이 낫고도 남을 시간.. Emergency? Urgent Care? 가더라도 별다른 조치나 특별한 약도 없이 푹 쉬고 따뜻한 차나 물을 많이 마시라고 할 것이 뻔했다.
그렇게 우리는 굳세게 견뎌내기로 다짐했다.
사실 가장 힘들었던 건 엘리였을지도 모른다. 격리 기간 동안 엘리는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으니까.
"밖에 나가자! 공원 가자!"
열이 떨어진 후에는 날씨 좋을 때마다 West Manor Park라던가 Village Homes 같이 근방의 공원을 마스크를 쓰고 산책하곤 했다. 아직 몸이 삐끄덕삐끄덕 거리고 가래로 인해 숨쉬는 것 조차 힘들었지만, 집에서 공사 소리와 하얀 가루를 맞고 있는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가볍게 움직이는게 더 회복이 빠를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있었다.
'주말에는 공사를 안할 테니까 좀 쉴 수 있겠지.'
라는 기대는 무참하게 깨져버렸다. 주말인데도 공사는 계속됐다. 아니 미국에서 이런 일이... 아마도 촉박한 일정 때문이 아닌가 싶었지만, 주말마저 cozy한 우리 집에서 쉴 수 없는 현실에 화가 머리 끝까지 차올랐다.
너무 시끄러워서 도저히 집에 있을 수 없었던 우리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일단 밖으로 나갔다.
"우리 UC Davis King Hall로 가자. 거기는 주말이니까 조용하겠지."
남편도 밀린 THEMIS 강의에 학교 수업까지 들어야 하는 상황. 다행인지 불행인지 펜데믹 사태 이후로 인트라넷을 통해 지난 수업을 들을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King Hall로 향했다.
그런데...
"뭐야,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
UC Davis Picnic Day. 하필이면 그날이 학교 축제 날이었다. 작년에 갔다온 후 다시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그 행사 말이다.
사람이 참 간사한 것이 같은 캘리포니아의 4월 햇살은 코로나 환자에게 너무 폭력적이었다. 작년에는 너무나도 화사했었는데.. 어렵사리 초록색 가래를 삼키며,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으며, 엘리를 싣은 유모차에 몸을 기대어 겨우겨우 캠퍼스를 거닐었다. 기력이 너무 없어서 사진 한잔을 찍을 수 없었다.
나는 이렇게 힘든데, 옆에 지나가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행복해보였다. 우리는 몸 뉘여서 제대로 쉴 집도 없고, 미래도 불확실한데 몸은 아프고…
그 때, 엘리가 갑자기 소리쳤다.
"엄마, 저거!"
자전거 안전 캠페인 부스. 직원이 엘리를 보더니 웃으며 헬멧과 라이트를 건넸다.
"Free for kids!"
평소 같으면 "Thank you so much!"라고 했겠지만, 그날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머리가 멍해서 아무 생각이 안 났다.
결국 In-N-Out Burger로 저녁을 해결했다.
"cheeseburger, cut in half please."
인앤아웃은 요청하면 버거를 반으로 잘라준다. 엘리가 먹기 좋게. 바닐라 쉐이크가 목구멍을 시원하게 적셔줬다. 엘리는 레모네이드를 쪽쪽 빨았다. 남편은 햄버거를 씹으며 노트북으로 강의를 들었다.
"Bar 시험... 이게 맞나...“ 남편이 읍조렸다.
"하, 이제와서? 미쳤어?"
"농담이야. 그냥... 너무 세상이 억까하는 것 같아서."
농담이 농담 같지 않았던 4월이었다.
폭풍 같은 2주가 지나고, 천장 공사도 끝났다. 우리의 코로나도 끝났다. 4월도 끝나가고 있었다. 드디어 평온이 찾아온 줄 알았다.
그때까지는.
4월 29일 아침, DPNS 부모 채팅방이 폭발했다.
자고 일어나니 메시지가 137개.
"뭐지?"
첫 메시지를 읽는 순간, 나는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Davis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