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한나 아렌트, 마르크스 Hannah Arendt, Marx
기차가 문경역에 들어서자 흐린 하늘 아래로 안개가 엷게 내려앉아 있었다.
진우는 작은 배낭을 메고 역을 나섰다.
버스를 타고 비교적 산길치 고는 잘 포장되어 있는 길들을 따라 오르다 보니 창밖 풍경이 점점 회색으로 물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이정표를 따라 폐광 근처에 도착하니 옛 탄광 막사와 녹슨 헬멧, 곡괭이가 전시되어 있었다.
바람은 차갑고, 흙먼지와 오래된 석탄 냄새가 공기에 배어 있었다.
가끔 시대를 건너온 인간의 땀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막사 앞 벤치에 앉아 녹슨 헬멧을 바라보는데, 회색 수염을 기른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왔다.
마르크스: “노동은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수단입니다.”
진우: “하지만 자본은 그걸 단순히 생산 도구로만 봤죠.”
마르크스: “그래서 인간이 소외되는 겁니다.”
진우: “이 소외는 여기, 이 헬멧과 곡괭이에도 남아 있군요.”
마르크스: “그건 피와 땀의 기록입니다.”
어느새 긴 목도리를 두른 한나 아렌트가 존재감 있는 느린 걸음으로 다가와 둘 사이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아렌트: “저는 노동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는 말이 두렵습니다.”
진우: “왜죠?”
아렌트: “반복적인 생존 노동은 인간을 사유에서 멀어지게 하거든요.”
마르크스: “동의합니다. 하지만 노동을 공유와 연대의 구조로 바꾸면 달라집니다.”
진우: “그럼 문제는 노동의 형태인가요?”
아렌트: “그렇죠... 삶을 유지하는 노동과 의미를 만드는 노동은 다릅니다.”
진우는 무릎 위에 올려둔 작은 병을 들었다.
진우: “도라지청 한 모금하시겠어요? 목이 좀 타네요.”
아렌트: “고맙습니다. 이런 소소한 나눔이 노동의 본질일지도 모르겠네요.”
마르크스: “노동의 본질은 ‘함께’입니다.”
진우: “하지만 현실의 노동은 ‘각자’로 향하죠.”
마르크스: “자본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아렌트: “그리고 사람들은 그 구조를 너무 쉽게 받아들였죠.”
폐광 너머의 숲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개가 골짜기를 감싸고 나무 사이로 희미한 빛이 스며들었다.
진우: “이 길을 걸었던 광부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마르크스: “아마도 하루의 끝, 저녁 식탁, 가족의 얼굴...”
아렌트: “혹은 아무 생각도 못 했을 겁니다. 피곤함이 모든 사유를 지우거든요.”
진우: “그렇다면 생각할 틈이 없는 삶은 존엄이 없는 건가요?”
아렌트: “존엄은 시간 속에 있습니다. 시간 없는 삶은 존엄도 잃습니다.”
마르크스: “그래서 노동시간을 줄이는 게 중요한 겁니다.”
그들 모두는 굳이 현대화되어서 전시되어 있는 전시관에는 들어갈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계속해서 숲길로 산길로 걸었다. 마치 이전의 노동자들의 마음을 공감하고 싶은 듯 어느 순간 불편한 나무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진우는 군고구마를 꺼냈다.
진우: “함께 먹는 이 순간이 이상하게 더 ‘인간적’이네요.”
마르크스: “노동의 결실이 공유될 때, 인간은 인간다워집니다.”
아렌트: “하지만 그 결실이 거래만을 위해 존재하면 인간성은 사라집니다.”
진우: “그럼 우리는 도구인가요? 존재인가요?”
마르크스: “존재입니다. 다만 도구로 취급받을 뿐이죠.”
아렌트: “그 취급을 바꾸는 게 정치의 역할입니다.”
짙은 안갯속에서 나무 그림자가 흐릿하게 흔들렸다. 산속의 안개는 그들의 세상을 현실과 분리시키는 것만 같았다. 그 안갯속에는 많은 목소리가 담겨있는 것 같았다. 마치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를 머무는 '무엇' 같았다.
진우: “노동이 우리를 살린다면 생각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나요?”
아렌트: “생각은 우리를 자유로 이끕니다.”
마르크스: “자유 없는 삶은 생존일 뿐입니다.”
진우: “하지만 생존 없이는 자유도 없죠.”
마르크스: “맞습니다. 그래서 둘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아렌트: “문제는 균형입니다.”
안개가 더 짙어지자 세 사람은 잠시 말을 멈췄다. 심호흡을 크게 하자 몸속으로 들어온 안개는 묘한 향, 묘한 냄새, 심지어는 묘한 맛까지 느껴졌다. 특히 안개 안에서는 무엇인가 탄 냄새가 가장 강하게 느껴졌다.
진우: “이 냄새... 아직도 남아 있네요.”
마르크스: “과거는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렌트: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도 인간의 몫이죠.”
진우: “그 몫이 노동일까요, 아니면 기억일까요?”
마르크스: “둘 다입니다.”
아렌트: “기억 없는 노동은 허무하고 노동 없는 기억은 공허합니다.”
아렌트와 마르크스는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우는 한참을 듣고 있다가 둘 사이의 대화를 방해할 수 없어서 먼저 일어나 폐광을 내려오며 생각했다. 진우를 따라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었던 장소의 안개 중 일부가 조용히 진우의 뒤를 따라가는 것만 같았다.
'노동이 우리를 살게 하지만 생각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든다. 삶은 둘 다 필요하지만 어느 하나가 지워질 때 인간도 지워진다. 폐광의 길 위에서 나는 느꼈다. 인간의 존엄은 빵과 사유, 둘을 모두 품을 때만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