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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 피어날까?

by 솜사탕수박라떼

나는 고등학교 때 전교 1등이었다.

아빠는 공부가 밥먹여주냐며 대학갈 생각을 하지말라했다.

재미있는건 내 동생도 전교 1등이었다.

고3이 되었을 때,

내 친구들은 주말마다 서울에 논술 학원을 다니고, 영어 과외를 받았다.


나는 돈이 없었다.

그래서 명절에 받은 돈을 아끼고 아껴 독서실 비만 간신히 냈다.

주말이 끝나고

월요일에 학교를 가면

논술학원 갔던 내 절친들이 학원 끝나고 다녀온 떡볶이집 이야기를 하며 신나게 대화를 이어갔고,

대화에 낄 수 없었던 나는 열등감에 한숨만 푹푹 내쉬며 문제지를 풀었다.


그렇게 한참 휘청거리던 어느날,

동생이 나에게 말했다.

"언니, 나는 국립대 갈 생각이 없어. 나는 내가 가고싶은데가 있으니까 언니가 국립대 갔으면 좋겠어."

"그래. 알았어."


그 때 생각해보면 나나 동생이나 어리긴 했다.

등록금을 집에서 대주지 않을껄 알면서도

내가 동생에게 피해가 가면 안된다는 생각에 지방국립대를 지원했다.

아마도 내 생각에 그때 첫 등록금은 엄마가 내주지 않을까 내심 바라던 마음도 있었나보다.

내가 동생한테 해줄 수 있는게 그것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당연히 붙을 곳을 썼기 때문에 수능도 대충 봤다. 커트라인만 넘겼으면 되니까.


합격통지서가 나오고 장학금을 받고 학교를 갔으나 기숙사비를 낼 돈이 없어서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


스무살이 되자마자 빚쟁이가 되다니.

어깨가 무거웠다.

누구한테 부탁하고 신세지는것도 싫어하는 애가 빚을 졌으니 오죽 했을까.


대학 동기들은 매일 부어라 마셔라. 미팅에 과팅에 대학의 낭만을 즐기기 바빴지만

나는 주말마다 풀타임 알바를 뛰며 용돈을 벌기 바빴다.


삶이 벅찼다.

전공에 복수전공에 교직이수에 알바, 짬짬이 학교 근로까지.


한해도 쉽지 않았던 대학 생활이 끝날 때 쯤.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나를 받아줄 곳이 한 군데도 없겠어?' 라는 생각을 했다.

허투로 보낸 순간이 없었기에 졸업 전에 취업을 할 수 있을 수 알았다.


하지만 난 88만원 세대. 삼포세대였다.

취업 시장은 전쟁이었고 그곳에서도 역시 부익부 빈익빈이 생겼다.

더군다나 아직 보수적인 우리나라 고용시장에서는 남자들을 더 원했다.


결국 졸업 전까지 나는 취업을 못했고, 졸업을 맞이했다.

나는 내몸하나 어디 맡길 곳이 없었기 때문에 멈출 수가 없었다.

하반기 공채 시즌이 끝나고 다음해 2월까지,

나는 사람인에서 300개의 회사에 지원했다.


결과는 모두 불합격.

성적도 괜찮았고.

토익도 괜찮았고,

은행 홍보대사를 하면서 대외 활동을하고

무역박람회를 추진하면서 해외 박람회 경험도 쌓았다.

하물며 중국어는 최고 급수였다.


내가 쓸모없게 느껴졌다. 밖에 나가는 것도 두려워졌다.

'나는 언제 활짝 필 수 있지? 내가 그렇게 부족한가?'

아침에 눈을 뜨는게 곤욕이었다.


하루종일 방안에 쳐박혀 있다보니 점점 내안에 갖히는 것 같아

일부로 생수병 하나를 들고 약수터에 물을 뜨러 갔다.

그렇게라도 나가는 이유를 만들어야 집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러다 약수터 주변을 거닐다가 마주친 글귀하나.

"꽃 마다 피는 시기가 다르다."

그 문장 하나가 마음속에 깊이깊이 새겨졌다.


'그래, 모든 꽃이 다 봄에 피지는 않아. 나는 겨울 꽃일수도 있어.'

그 말 한마디가

나를 10년동안 살렸다.

내가 들은 어떤 이야기보다 가장 위로가 되었다.


하얀 눈속에도 붉은 꽃망울을 터뜨리는 동백꽃을 떠올리며,

만물이 무채색이 됐을때, 내가 아름다운 꽃을 피우리라.

작은 희망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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