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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대역죄인이다.

그런 일이 있었지!

by 김사임


결혼 전까지 마당에 우물이 있는 주택에서 살았다.
우물이 있는 샘터에서는 많은 것을 해결했다.
빨래도 하고 야채도 씻고 세수도 머리 감는 일까지...

여름이면 우물 안에 오이와 참외를 던져 놓고 시원해지면 건져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겨울엔 우물에서 김이 뽀얗게 오르고 우물물이 따뜻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데는 별 불편함이 없었지만, 그 무렵에는 다들 펌프를 사용했기에, 우물에서 물을 긷는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이는 건 왠지 부끄럽다고 여겼다.

지금 생각하면 우물에서 물을 긷는 것과 펌프질이 별 차이도 아닌데 그 당시는 그랬던 것 같다.

마당 주변엔 나무와 꽃들이 우거져 마치 아담한 공원처럼 분위기가 좋았다. 그러니 손님들이 자주 방문했다. 넓은 평상에서 술과 음식을 나누고 분위기는 밤으로 갈수록 무르익었다.






그날도 아버지 직원분들이 놀러 왔다.
기분이 좋아지신 아버지가 나에게 포도를 씻어 오라고 하셨다.
나는 왠지 싫었다.


평소에도 나는 거의 심부름 담당이었지만, 그날은 아버지 직원들 사이에 나에게 호감을 보이던 총각 직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샘에서 물을 퍼올리면, 평상에서 뒷모습을 자연스레 지켜보게 된다.

'아가씨가 물을 퍼올리는 뒷모습이라니...'

그 당시 내 생각에는 그건 이미 여자로서 품위를 내려놓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하늘 같은 아버지 말씀을 거부할 수 없었다. 태연한 척 물을 길렀지만, 등뒤로 쏟아지는 뭇사람들의 시선에 등덜미가 타는 거 같았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아버지 직원들이 괜스레 야속하게 느껴졌다. 나는 조신한 척 샘가에 쪼그리고 앉아서 포도를 씻었다.

나를 좋아한다는 총각이 엄마가 좋아하는 고기를 사 오고, 아버지께 살갑게 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왠지 억울했다 '나를 좋아한다면서 아버지 엄마에게 환심을 사려하다니... 그런다고 내 마음이 움직이나 봐라' 그 남자에게 괜한 심통이 났다.

그런데 어찌 된 게 아가씨가 머슴처럼 물바가지나 퍼올리고 있으니, 내 남자에게 가장 예쁘게 보이려고 품어왔던 로망은 물거품이 되는 듯했다.

그렇게 뒷모습을 보인채로 부아를 삭히며 포도를 씻었다. 그리고 마음에도 없는 미소를 띠며 쟁반을 들고 돌아설 때였다.

아뿔싸!!

그 순간 신고 있던 파란 슬리퍼가 젖은 물기 때문에 삐끗 어긋나고 말았다. "어. 어..." 순간 중심을 잡으려 했지만 포도 쟁반을 쳐들고 슬로 모션으로 휘청이다가, 그대로 철퍼덕 마당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공중으로 비상하던 포도가 땅바닥에 나뒹굴고 나는 흙투성이가 됐다. 엄마와 그 총각이 동시에 달려왔다.


섬섬옥수 단아한 모습도 부족할 상황에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물 긷는 뒷모습에 이미지를 망쳤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돌이킬 수 없이 엉망이 되어버린 것이다.

엄마가 내 어깨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자 그 총각은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더니, 마당에 나동그라진 슬리퍼를 두 손으로 공손하게 들었다. 그러더니 마치 신줏단지라도 되는 듯이 파란 슬리퍼를 내 발 앞에 재빨리 대령했다.

신데렐라 구두도 아니고 낡은 파란 슬리퍼..

"괜찮으세요? 아이고 조심하시지..."

창피해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아. 괜찮아요." 했지만

'너라면 괜찮겠니?'


마음속에서는 마른 낙엽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나에게 '여자가 칠칠치 못하게 ...' 이런 눈빛이셨지만, 그 총각에게는 공무원 시험 전국 1등 한 인재라고, 야무지고 똑 부러진 녀석이라며 자랑스럽게 소개하셨다.


하지만 평소에 남자 조심하라고 엄격하시던 아버지에 대한 은근한 반발심과 나보다 더 인정받는 그 총각이 얄미웠다.


"흙투성이 처녀와 유능한 총각?"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거절할 이유를 고민할 필요 없이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샘에서 물 긷는 내 뒷모습을 훔쳐본 죄.
*포도 쟁반 들고 트위스트 추며 땅에 처박힌 꼴을 지켜본 죄.
*초라한 파란 슬리퍼를 내 앞에 공손하게 내민 죄.
*머리 좋다고 나댄 죄.

*나보다 부모님께 먼저 설레발친 죄.


죄목이 많기도 했다.
그리하여 내가 내린 중대한 결론은

'당신은 오늘부터 대역죄인이다!!.'

그는 하루아침에 내가 일방적으로 덮어 씌운 대역죄인이 되고 말았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그는 우리 부모님께 후한 점수를 따고, 샘터에서 나에게 공손하게 어필했다고 생각했나 보다.


드디어 내게 정식 데이트를 신청해 왔다. 하지만 난 보기 좋게 거절했다.

'대역죄인'의 내막을 몰랐던 그 총각은 결국 상사병이 났다고 했다. 열이 나고 직장까지 결근을 했다고 아버지가 귀띔하셨다.

어떻게든 나를 회유하려는 아버지의 설득에도 나는 이미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직까지 아무도 모른다.
그 총각과는 결국 단 한 번도 데이트도 없이 끝나고 말았다.






훗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총각은 더 좋은 직장으로 이직하여 승승장구했고, 예쁜 여자를 만나 가정도 꾸렸다고 한다.

아버지가 그런 소식을 전해주실 땐, 왠지 모를 아쉬움이 묻어나는 듯했다.

괜한 객기를 부렸나?
그런 일로 멀쩡한 사람에게 대역 죄인을 만들었으니 말이다.

샘터가 있던 그 집은 그 당시엔 불평도 많았지만, 화단이 예쁘고 갖가지 꽃나무와 과일수가 많아 철마다 떠오르는 추억이 많다.

왜 그때는 내가 가진 것들이 좋다는 것을 몰랐을까?


지금 생각하면 그는 유능하고 부모님께도 잘하는 사람이었을 것 같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나와 인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후로 많은 세월이 흘렀다.
괜한 심통으로 멀쩡한 사람에게 씌웠던 "대역죄인" 프레임
나만 알고 있던 그 시효를 이제는 거둔다.



당신은 원래 무죄입니다.

그 시절에도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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