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수염은 어디로 갔을까?

철없는 손녀

by 김사임



"아이고 이게 누구냐?
어서 오너라, 많이 자랐구나!"

아버지를 따라 5학년 무렵 큰댁에 도착했을 때, 큰어머니가 활짝 웃으며 반겨주셨다.

아마도 추석 무렵이었을 것이다. 산소에 벌초하러 가신 아버지를 따라간 날.

서둘러 안방에 계신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렸다.
할머니와 큰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고, 할아버지는 중풍으로 두 차례나 쓰러지신 상태였다.

거동이 어려우신 할아버지를 모시는 건 대부분 큰어머니 몫이었다.
그날 할아버지의 눈빛은 흐리고 초점이 맞지 않았다. 아는 듯 모르는 듯, 묘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셨다.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들이 벌초하러 떠나자, 나와 사촌동생이 할아버지 곁을 지키게 됐다.
사촌은 나보다 한 살 어린 거의 단짝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아프신 할아버지께 뭔가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어른들이 없는 틈을 타, 할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자며 사촌과 손을 맞잡았다.

"할아버지, 춤 보여 드릴까요?"
끄덕끄덕, 할아버지는 희미하게 웃으셨다.

우리는 어른들 한복을 걸치고 어설픈 춤을 추기 시작했다.
되지도 않는 춤사위에 우리 둘은 흥이 올랐고, 할아버지는 어허 어허 소리 내어 웃으셨다.

그렇게 분위기가 무르익자, 이번엔 식사까지 챙겨드리기로 했다.
흘리면 닦아드리고, 반찬을 건네며 물었다.

"할아버지, 이거 드릴까요?"
"응~" 하고 환하게 웃으셨다.

이렇게 잘 드시는데 어른들이 왜 식사가 힘들다고 했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던 중, 이유를 알아챘다.

국을 떠드리면 할아버지 입가로 국물이 자꾸 새어 나왔다.
게다가 길게 자란 수염이 국물을 타고 흘러내려 닦아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왜 이렇게 불편한 수염을 그냥 두실까?'

"할아버지, 수염이 불편하세요?"
"엉~"
"깨끗하게 잘라 드릴까요?"
"엉~" 하시며 웃으신다.

어린 나는 중풍 후유증으로 할아버지 인지 상태가 안 좋으신 걸 알 리 없었다.
어른이 허락하셨다니 아주 잘 됐다는 생각뿐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우리는 그날 최고의 이벤트에 돌입했다.
할아버지의 수염을 깨끗하게 잘라 드리기로 한 것이다.
(아~ 미쳤죠! ㅋㅋㅋ)

가위를 들고 싹둑싹둑.
할아버지의 위엄의 상징이던 수염은 순식간에 방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수염이 없어진 할아버지는 낯설게 보였지만 깔끔하고 예뻐 보이기까지 했다.
임무를 수행한 우리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어른들 오시면 칭찬받을 일에 어른들을 손꼽아 기다렸다.





얼마 후, 어른들이 돌아오셨다.
할아버지를 보는 순간 어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아버님 수염이 어디로 간 거여?"
"오매, 이것이 뭔 일이다냐?"

놀람과 의심 어린 눈으로 우리를 째려보시는 어른들...

눈치 빠른 사촌 동생이 왠지 주춤거리는 걸 느꼈지만 칭찬받을 생각에 눈치 없던 나는
상황 파악도 못한 채 자랑스럽게 말했다.

"할아버지 수염에 국물이 흘러서 우리가 정리해 드… 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떽!!!!!"

귀청이 떨어질 듯한 불호령이 떨어졌다.

"누가 어른 수염을 버르장머리 없이 함부로 손을 대나!
니들 혼 좀 나야겠구나!"

칭찬 대신
갑작스러운 꾸중에 눈물이 쏙! 나왔다.
착한 일 하고 혼난 억울함과 놀람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날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이 난다.
다행히 이후로 할아버지는 늘 수염을 짧게 다듬으셨다.
무모했지만 그 시도가 나름 효과가 있었던 셈이다.

아마 어른들은 차마 하시지 못했을 것이다.
부모님 수염을 누가 함부로 자를 생각을 했겠는가? 부모님에 관한 일은 늘 조심스럽고 어렵지 않은가.

철없던 우리는 몰랐기에 시도할 수 있었다.
그 무모함이 오히려 다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할아버지를 수발하시는 큰어머니께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열두 살 무렵, 참 당돌하고 무모했다.
어르신 수염을 감히 자르다니, 한마디로 아찔한 일이었다. ㅎㅎ

그 시절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
옳다고 믿으면 주저 없이 달려들던 용기가 있었다.
이제 와선 무모했던 그 시절이 조금 그립기까지 하다.ㅎㅎ

그때로 돌아간다면 또 할아버지 수염을 자를 수 있을까?
어헛~!!ㅋㅋㅋ

어디선가 그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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