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여행자 DNA 깨어나는 중

밀라노 바느질남이 떠올라 끄적끄적

by Mira

1. 지도 보는 즐거움

지도를 보고 도시를 정하고

부동산 시세, 생활환경, 병원과 교통, 문화시설까지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냥 여행 한번 가볼까? 가 아니라

여기서 한번 살아볼까?

하는 마음으로 보니까 또 다르다.


강릉 답사 계획

더위가 한풀 꺾이는 9월에 강릉에 다녀오려고 한다.

호텔부터 한옥 스테이까지 선택지가 많아서 검색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문득 나는 '현실'에 온전히 집중하기보다는

늘 어딘가 '빠져나갈 곳'을 찾으면서

미래를 상상할 때

더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든다.


Anywhere But Here!

의 정신으로 여행자처럼 떠돌며 사는 인생을 꿈꾸었다.

대학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 시절,

나를 버티게 해 준 것은

유럽 배낭여행에 대한 채들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도시들을 내 발로 걷고 기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꿈이 대학에 가는 이유였다.


대학 1학년 첫여름 방학에 미국을 다녀오고

그 해 가을에 온갖 계략(?)으로 엄마를 살짝 속여서

유럽 여행을 다녔다. 무려 1991년도에.


밀라노 기차역

파리와 독일을 지나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

나는 체력적으로 완전히 방전되었다.

걷는 것도 지겨워졌고

혼자 가방 하나 챙기면서 돌아다니다 보니

몸살도 났다.

그래도 내 몸은 내가 지켜야 하고

내 가방도 내가 지켜야 하는 삼엄한 현실.

기차에서도 심지어 유스 호스텔에서도

워커를 벗지 않고 잠을 잤다.

여차하면 워커로 이단 옆차리를 날려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낯선 사람과 눈빛이 스칠 때,

본능적으로 이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판단해야 한다.

운이 좋으면 행운을 빌어주며 나에게 에스포레소 한 잔 정도 사주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었다.

운이 나쁘면 이상한 숙소로 안내하는 삐끼한테 말릴 수도 있다.


밀라노 기차역, 자정이 넘은 시간,

마약 딜러처럼 생긴 놈이 자꾸 치근덕 거린다.

나는 빛과 같은 속도로 기차역을 스캔했다.

도와줄 누군가를 찾아서.


그때 바닥에 앉아 구멍 난 양말을 기우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우리는 눈이 마주쳤고 나는 말없이 그에게 다가가 앉았다.

딜러 놈이 쫓아와 정신없는 이태리어로 떠드니까

그 바느질남이 단호하고 조용히 말했다.


She is mine.


딜러 놈의 끈적한 눈빛,

그를 밀어내는 낮은 목소리

나의 좌뇌와 우뇌가 동시에 풀가동된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다정하고

안정감이 느껴지는 목소리는 처음이었다.

딜러 놈이 나에게 진짜냐고 물었고 나는 약간 풀린 눈으로 그렇다고 했다.


그놈이 계속 횡설수설하면서 바느질남과 이야기를 했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들도 이태리어와 영어라는 언어의 장벽에서 낑낑대는 거 같았다.


딜러 놈이 덤비면 그가 바늘로 응수할까?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다행히 바늘이 출동하는 사태로 이어지지는 않았고, 딜러 놈도 더 이상 재미가 없었는지 자리를 떠났다.

새벽 2시가 넘은 텅 빈 밀라노 기차역 바닥에

바느질남과 나만 남았다.


어색한 공기가 감도는 가운데, 그의 양말이 거의 다 기워지고 있었다. 우리는 뭔지 알 수 없는 그 감정을 조심스레 깨뜨리며 인사를 했다.


이름은 뭐니.

어디서 왔니.


지금 그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어깨까지 내려오는 곱슬한 금발 머리와 헤질대로 해진 티셔츠, 낡은 청바지와 부츠가 생각난다.

길고 긴 손가락으로 섬세하게 바느질하던 그 움직임도.


그는 미국에서 온 대학생으로 유럽을 여행하고 있다고 했다. 그도 완전히 거지꼴이었지만 내쪽도 만만치 않았다.


경계와 안도사이

문득 나는 내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어디로라도 숨고 싶어졌다. 그리고 드문 드문 이야기를 이어가면서 나는 느꼈다.


그가 나를 경계하고 있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가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그런 꼬맹이가 생전 처음 본 여자애를 보호한다는 마음으로 묵직하게 선방을 날렸지만, 생각해 보면 이 여자애도 뭐 하는 애인지 알 수가 없는 거지.

자기 가방을 털어서 바느질 세트라도 뺏어가면 어쩌나

속으로 쫄았을지도 모른다.


나를 경계하는 그의 불안을 느꼈고, 어째서인지 그것을 해명하기보다는 그 자리를 떠나는 게 그에게 확실한 안도감을 주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려 30년이 지났지만, 그가 바느질 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바비거나 톰이었을지 모를 그 스무 살 남짓이 아이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때 도와준 동양여자애가 지금은 할머니가 되어서도 그를 기억한다는 걸, 꿈에도 모르겠지.


여행자 DNA

여행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건

본능적인 긴장과

말이 아닌 느낌으로 다가오는 순간들 때문에.


눈 감고도 다닐 수 있는 길을 걸어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일 한다.

가장 포근한 내 침대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삶의 선명한 순간들.


더 이상 지루할 수 없는 일상을

무려 30년이나 해 냈으니

나는 다시,

나의 여행 DNA를 깨워

여행자의 마음으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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