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학적 성 VS 사회학적 성]

`사회학적 성gender`으로 접근한 방법이 잘못된 이유


주디스 버틀러1956년 태생의 현역이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젠더 이론가이고 포스트모더니즘, 비판 이론, 정치철학, 윤리학, 페미니즘, 퀴어 이론

문학 이론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퀴어 이론의 창시자 격으로 여겨진다.

저서로 1990년에 출간한 <젠더 트러블>등이 있다. [출처] 나무위키


900%EF%BC%BFScreenshot%EF%BC%BF20250612%EF%BC%BF172400%EF%BC%BFGoogle.jpg?type=w773 구글 이미지 -주디스 버틀러-



1990년 당시는 미국에서 `다문화주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사회적 소수자`에 관심이 모아지면서 `차이의 정치`가 사상계를 주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출처] 현대 철학 로드맵 -arte 출판-


이런 소수자 중 하나가 게이와 레즈비언 같은 동성애자였고

이를 연구 결과로 퀴어 이론이 제창되었다.

퀴어 이론의 선구자가 `주디스 버틀러`이다.


주디스 버틀러

일반적으로 `성性`을 말할 때 `생물학적인 성sex``사회적, 문화적 성gender`를 구별해서 말한다.

상식적인 발상에서 말하자면 `사회적 성은 생물학적인 성에 바탕을 둔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버틀러는 이러한 구별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생물학적인 성` 또한 사회적으로 구축된다고 주장한다. [출처] 현대 철학 로드맵 -arte 출판-


버틀러`성`이 사회적으로 구축된 것이라면

`남자다`라든지 `여자다`와 같은 정체성은 자연히 생긴 것도 아니고 영원불변한 것도 아니라면서

그렇다면 사회적으로 구축된 정체성을 교란시키는 것도 가능할 것이라고 보고

`이성애`뿐만 아니라 `동성애`도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츨처] 현대 철학 로드맵 -arte 출판-


하지만 이에 대해 `마사 누스바움`이라는 미국 법철학자는

"인간의 `성``사회적인 관계`에 따라 전면적으로 구축되지 않으며

`젠더`자유롭게 바꿀 수도 없다." 주디스 버틀러를 비판한다.

[출처] 현대 철학 로드맵 -arte 출판-


`마사 누스바움`이라는 미국 법철학자는 1947년 태생의 미국의 철학자이다.

현재, 시카고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철학, 정치 철학, 페미니즘, 동물권을 포함한 윤리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사회자유주의, 자유주의 페미니즘 철학자이다. <혐오와 수치심>의 저자로 유명하다. 녹색자유주의의 대표적 사상가로도 알려져 있다. 페미니즘과 동물권, 성소수자 권리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또한 '혐오의 정치'에 반대하며 차별 금지법을 지지한다. [출처] 위키백과, 나무위키


900%EF%BC%BFScreenshot%EF%BC%BF20250614%EF%BC%BF132147%EF%BC%BFGoogle.jpg?type=w773 구글 이미지 -마사 누스바움-



퀴어queer

원래는 '기묘한', '괴상한'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였고 성소수자에 대한 멸칭으로 사용되었으나

성소수자들 스스로가 이 단어를 수용함으로써 비하하는 의미는 많이 사라졌다.

성 정체성의 스펙트럼은 게이, 레즈비언, 양성애, 트랜스젠더, 무성애와 같이 다양하기 때문에

이들을 한데 아우르는 명칭으로 채택되었다.

1994년 퀴어학이 정식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출처] 나무위키, 위키백과


퀴어학, 퀴어 이론과 같은 학술 연구에서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젠더를 남성과 여성 둘 만으로 규정하는 `젠더 이분법`이 실제 상황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파악한다. 개개인의 성 정체성은 스스로가 규범적 집단에 속한다고 여기더라도 실제로는 보다 복잡한 상호 교차성을 보일 수 있다고 한다.

의견이 다양할 것이지만 지금 2025년 현재 생물학적 남성과 생물학적 여성의 구분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젠더`를 `체질`과 `취향`에 따라 구분할 것을 제안해 본다.

`젠더`를 `체질`과 `취향`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자.>


국어사전에 따르면

체질이란 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몸의 생리적 성질이나 건강상의 특질로 육체적인 어떤 성향을 말하고

취향이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 또는 그런 경향을 의미하므로 정신적인 어떤 성향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생물학적 남성`과 `생물학적 여성`이 체질과 취향에 따라서

`사회학적 남성`과 `사회학적 여성`으로 구분된다고 본다면

지금과 같이 혼란스럽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생물학적 남성`이지만

체질과 취향이 남성스러움을 나타낼 수가 있고

체질과 취향이 여성스러움을 나타낼 수가 있을 것이다.


`생물학적 여성`이지만

체질과 취향이 여성스러움을 나타낼 수가 있고

체질과 취향이 남성스러움을 나타낼 수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체질과 취향 두 가지 모두가 남성스럽든지 여성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고

체질과 취향 중 한 가지만 남성스럽든지 여성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이 발현되더라도 기준 틀은 `생물학적 남성`과 `생물학적 여성`이다.


그리고

`육체의 특징`은 `생물학적 남성`과 `생물학적 여성`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굳이 이름을 정하고자 한다면


예를 들어 이제마의 `사상체질`을 빌려와서


`생물학적 남성`이지만

체질과 취향이 남성스러우면 `태양인`

체질과 취향이 여성스러우면 `소양인`


`생물학적 여성`이지만

체질과 취향이 여성스러우면 `태음인`

체질과 취향이 남성스러우면 `소음인`


처럼 남성과 여성의 의미가 드러나지 않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젠더`라는 갈등을 줄여줄 것이다.


이 이름은 `양`과 `음`의 표현이 있어 구분한 것이므로 한의학의 `사상체질`의 특징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육체의 성질`의 발현은 자연적인 것이다.>


`생물학적 남성`이지만

체질과 취향이 남성스럽든, 체질과 취향이 여성스럽든 이 사람은 분명히 `생물학적 남성`이다.


그리고

`생물학적 여성`이지만

체질과 취향이 여성스럽든, 체질과 취향이 남성스럽든 이 사람은 분명히 `생물학적 여성`이다.


`육체의 성질`의 발현은 자연적인 것이지 결코 인위적인 것은 아니다.


`생물학적 남성`이 남성스러울 수도 있고 여성스러울 수도 있다.

`생물학적 남성`이 소꿉놀이를 하면 왜 안되며

`생물학적 여성`이 격투기를 하면 왜 안되는가.


소꿉놀이를 한다고 해서 그 `생물학적 남성`이 `사회학적 여성`이라고 생각하고 느끼면서

성전환수술을 해야 하는가?


격투기를 한다고 해서 그 `생물학적 여성`이 `사회학적 남성`이라고 생각하고 느끼면서

전환수술을 해야 하는가?


아니다.


"`남성스러움`과 `여성스러움`의 사회적 구분이 <함정>이다."


남성스럽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을 것이다.


여성스럽다는 것은 무엇인가?

역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을 것이다.


머릿속에 떠오른 남성스러움과 여성스러움은 왜 그렇게 생각돼야 하는가?


지금 머릿속에 떠오른 그 `스러움` 혹은 `다움`이 반대가 돼도 되지 않은가?

`생물학적 남성`이 체질과 취향이 `여성`스럽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생물학적 여성`이 체질과 취향이 `남성`스럽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인가?


`생물학적 남성`이 꼭 `남성`스러워야 할 이유는 없다.

`생물학적 여성`이 꼭 `여성`스러워야 할 이유도 없다.

그저 그 사람의 `체질`과 `취향`이 그렇다는 것뿐이다.


`생물학적 남성`이 여성스럽게 말할 수도 있고 여성스럽게 행동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 `생물학적 남성`이 `생물학적 여성`인 것은 아니다.


`생물학적 여성`이 남성스럽게 말할 수도 있고 남성스럽게 행동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 `생물학적 여성`이 `생물학적 남성`인 것은 아니다.


이러한 체질과 취향의 발현을 굳이 `사회학적 남성`과 `사회학적 여성`으로 구분하는 것이

갈등을 조장하는 것이다.


"`사회학적 시선`을 바꾸면 `젠더`의 갈등은 점진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이러한 `사회학적 시선`이 바뀌면 굳이 타고난 `생물학적 성`을 다른 성으로 바꾸려고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생물학적 남성`이 직장에 다니지 않고 집안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사회학적인 시선은 "`생물학적 남성`이 일도 안 하고 뭐 하고 있지?"라며 비난한다.

그래서 그 `생물학적 남성`은 위축되고 `사회학적 여성`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어

자신이 `생물학적 남성`이 아니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그`생물학적 남성` 본인은 절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회학적 시선이 그렇게 여긴다는 것이다.


`생물학적 여성`에 대한 `사회학적 시선`은 요즘 시대에는 많이 개선되고 바뀌어서

`생물학적 여성`이 `사회학적 남성`으로 여겨지더라도 굳이 `생물학적 남성`으로 생각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인위적인 수술을 통해 `생물학적 남성`으로 바꾸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생물학적 남성`이 `생물학적 여성`으로 바꾸려고 하는 경향보다 강할 것이다.


이처럼 `남성스러움`과 `여성스러움`이라는 `사회적 시선`을 줄이고 궁극적으로는 없애는 것이고

`젠더`라는 표현보다는 체질과 취향에 따라 발현된다고 본다면


"`생물학적 남성`이 체질은 태양인이지만 취향은 소양인이다.

또는

`생물학적 여성`이 체질은 소음인이지만 취향은 태음인이다."


처럼 생각하고 바라본다면 `젠더`의 갈등은 없어질 것이라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의 말로 마무리한다.


"인간의 `성``사회적인 관계`에 따라 전면적으로 구축되지 않으며

`젠더`자유롭게 바꿀 수도 없다."

[출처] 현대 철학 로드맵 -arte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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