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와 딱 한잔의 반주

술은 어른의 물이야

by 마르치아




우리 집 밥상엔 아버지가 없었다.
어릴 적, 친구들처럼 "아빠!" 하고 불러볼 기회조차 없었다.
내 기억 속 아버지는 사진 속에 조용히 웃고 있는 남자였고
엄마는 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마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조용히 밥숟가락을 들었다.



나는 그 눈을 보며 아버지를 상상했다.
때로는 영웅처럼, 때로는 그림자처럼.

할아버지는 그런 내 옆에 조용히 앉아 계셨다.



말이 많지 않으셨고,
대신 행동으로 마음을 따라주셨다.



밥을 다 먹고 나면 술병을 조심스럽게 꺼내셨고
작은 유리잔에 술을 한 모금 따르셨다.



그 잔은 늘 작았고, 조용했고, 느렸다.
마치 시간을 따라 마시는 사람처럼
한 모금에 하루를 담는 사람처럼.



“경화야, 이건 어른의 물이야.”
할아버지가 말하셨다.



“기쁜 날 마시면 감사하고,
슬픈 날 마시면 괜찮아진단다.”



그 말이 나는 어릴 적엔 잘 와닿지 않았다.
왜 술이 괜찮음을 주는지
왜 눈물 많은 날에 오히려 잔이 따라지는지
나는 그게 참 이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어 나도 혼자 식탁에 앉는 날이 많아지자
할아버지의 그 말이,
마음속에서 천천히 우러나기 시작했다.



밥을 먹고 나서도 허기가 가시지 않는 날.
누구에게도 기대기 어려운 날.
말 한마디보다 더 조용한 것이 필요할 때
나는 작은 잔을 꺼냈다.



할아버지의 반주는 취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마음의 결을 고르게 펴는 물결이었고,
허기와 그리움 사이를 잇는 다리였다.



누룽지처럼 눌어붙은 외로움을
조금씩 떼어내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잔에는 늘 아버지의 빈자리가 있었다.



나는 그 잔을 보며 자랐다.
아버지를 몰랐지만,
할아버지의 잔을 통해
어떤 아버지였을지를 상상했고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할지를 배웠다.



할아버지는 잔을 기울이며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지만
그 침묵은 언제나 울림으로 남았다.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가끔 그 잔을 따라 본다.



한 모금은 지난날의 회한으로
한 모금은 오늘의 다짐으로.



그리고 남은 잔은
아직 만나지 못한 아버지를 위한 것으로 남겨둔다.



할아버지가 그러셨듯,
나는 이제 나만의 방식으로
빈자리를 견디고, 기리며, 품는다.

술은 반이었다.



나머지 반은 언제나 마음이었다.
그건 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억하기 위한 것.



그건 잊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천천히 녹여내기 위한 것.



나는 할아버지의 잔을 마시며
아버지를 상상했고
나를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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