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물김치

여름 필수반찬

by 마르치아




우리 집 여름엔 늘 가지 물김치가 있었다.

단 한 해도 빠짐없이.

열무도 오이도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없었다.

가지 물김치는 여름 밥상의 시작이자 마무리였고,

엄마의 손끝이 가장 부드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엄마는 가지를 고를 때

보라색이 선명하고

속이 차면서도

손에 쥐면 약간 휘는

적당히 여문 가지를 고르셨다.


“경화야, 너무 굵은 건 안 돼.

씨가 많고, 푹 익으면 질겨.

너처럼 연하고 야문 게 맛있어.”


나는 그 말이 좋았다.

‘너처럼’이란 말이

가지 하나를 고르면서도

나를 닮은 무언가를 떠올렸다는 게.


집에 돌아오면

엄마는 가지를 깨끗이 씻고

양쪽 꼭지를 자른 다음

길게 반으로 가르셨다.

안쪽에 단단하게 박힌 씨를 손가락으로 쓸며

“이건 아직 어린 가지야”

그렇게 말하셨다.


반으로 갈라진 가지는

굵은 소금을 살짝 뿌려

그늘진 부엌 한켠,

소쿠리에 널어두었다.


“그냥 물에 담그는 게 아니야.

가지가 스스로 수분을 덜어내야

나중에 물김치가 흐려지지 않아.

사람도 그래.

안에서 너무 많은 걸 쥐고 있으면

국물은 탁해져.”


그 말을 나는 그땐 몰랐지만,

지금은 좀 안다.

내 마음도

덜어낸 만큼 맑아진다는 걸.


반나절쯤 흐르면

가지는 색이 조금 어두워지고

손에 쥐었을 때 부드럽게 휘었다.

엄마는 거기에

송송 썬 풋고추, 마늘 편, 생강채를 더하시고

물은 끓이지 않았다.

대신 하루 전날 미리 담가두었던

보리밥을 우린 물을

체에 밭아 식힌 뒤

그 자줏빛 가지 위로

조심스럽게 부으셨다.


“이게 비법이야.

끓인 물은 숨을 막고,

보리밥 우린 물은 숨을 살려.

그 숨결이 자줏빛이 되면

맛도 같이 깊어지는 거지.”


엄마의 말은 언제나

조리법보다 느림과 마음에 가까웠다.


유리병 뚜껑을 덮고

냉장고 맨 위칸에 가지 물김치를 넣을 때

엄마는 꼭 말하셨다.


“이건 사흘 뒤에 먹자.

처음엔 자줏빛만 돌다가

점점 안으로 물이 들거든.

사람도 그래.

겉은 멀쩡해 보여도,

속은 시간이 지나야 맛이 배.”


나는 그게

사람에 대한 얘기인지

김치에 대한 얘기인지

그땐 몰랐지만,

지금은 다 알아버렸다.

어른이 되고 나니까

그 말들이 이제서야

소금처럼 입에 녹는다.


요즘 나는

엄마 없이 가지 물김치를 담근다.

가지 꼭지를 자를 때마다

엄마 손이 자꾸 떠오른다.

자줏빛 물이 올라올 즈음이면

괜히 혼자 말을 꺼낸다.


“엄마, 이건 식힌 물 아니야.

그냥 눈물이지 뭐.”


하지만 그 물도

찬 밥 위에 얹으면 시원하다.

그냥 밥 한 그릇,

그냥 김치 한 점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말들과

흘린 것들과

사라진 것들이

입안 가득 퍼진다.


나는 오늘도 가지 물김치를 담근다.

엄마가 말하던 그 ‘숨결’을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내가

다시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할 날이 올까봐.


“그건 아직 어린 가지야.”

“국물은 시간이 들어야 맛이 나.”

“보리밥 우린 물로 담가야,

속이 살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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