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익는다는 의미를 알게됬다
나는 다섯 살이었다. 엄마는 부엌에서 김치통을 꺼내셨다. 플라스틱 뚜껑을 여는 순간 시큼한 냄새가 방 안 가득 퍼졌다. 나는 그 냄새를 맡고 눈썹을 찌푸렸지만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며 웃었다.
“다 쉬었지? 이럴 땐 지져야 맛있어.”
엄마는 김치를 찬물에 살짝 헹궜다. 강하지 않게, 양념을 다 털지 않고 딱 그 김치의 체면만 살려줄 정도로. 물기 빠진 총각김치를 채반에 엎고 나는 그 옆에 쪼르르 앉아 있었다.
엄마는 은색 냄비를 꺼내 석유곤로 위에 올렸다. 심지를 조심스레 돌려 파르르 떨리는 불꽃 하나. 부엌에 작은 온기가 깃들었다.
냄비 바닥에 버터를 한 조각 넣고 지글지글 녹기 시작할 때 엄마는 설탕을 한 숟가락, 멸치를 툭툭 손으로 잘라 넣으셨다.
“버터는 김치의 신맛을 눌러주고, 설탕은 살짝만. 멸치는 국물 대신.”
엄마의 말투는 늘 조용했고, 말보다 손이 먼저였다. 그 손이 지짐 위를 이리저리 쓸고 지나갈 때 나는 무언가 마법 같은 것을 느꼈다.
총각김치를 냄비에 눕히는 순간, 부엌은 완전히 다른 공간이 되었다. 김치가 익어가는 냄새, 버터가 퍼지는 향, 멸치에서 올라오는 구수함. 그 모든 것이 함께 어우러졌다.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조심스럽게 냄비를 들여다보았다. 석유곤로 안 유리창 너머의 불꽃은 빨갛고 작았고, 그 불빛에 김치 조각들이 살금살금 색을 바꾸고 있었다.
엄마는 말없이 숟가락으로 지짐 위 국물을 끼얹었다. 버터와 멸치, 설탕이 어우러진 그 국물은 김치 줄기 사이를 조용히 흘러내렸고, 한참이 지나자 무는 살짝 투명해지고 국물은 자작하게 졸아들었다.
“경화야, 다 됐다. 먹어봐.”
엄마는 총각무 하나를 잘라 숟가락에 얹어 내게 주셨다. 나는 조심스레 입에 넣었다. 앞니로 베어 물자 겉은 부드러웠고 안쪽은 아직 단단했다. 살캉. 무가 어금니에 부드럽게 걸리는 순간, 그 속에서 조용히 국물이 터졌다.
달큰하고 짭짤하고 시큼한 맛이 한꺼번에 터져나왔고, 혀끝은 버터의 고소함에 젖었고 목은 멸치 국물의 여운을 기억했다. 나는 그 순간 무를 씹고 있는 게 아니라 뭔가… 시간을 깨무는 것 같았다.
엄마는 말없이 내 표정을 살폈고,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맛있다고. 그러자 엄마는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그 손이 따뜻했다. 지짐처럼. 속까지 천천히 데워주는 온기였다.
지금 나는 익어버린 총각김치를 보면 쉽게 버리지 못한다. 엄마가 그날 김치를 다뤘던 손길, 불의 높이, 국물 끼얹는 그 조심스러움을 어느 날부터인가 나도 따라하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그 무 하나를 베어 무는 순간마다 내 안엔 다섯 살의 내가 무릎을 꿇고 앉아 엄마의 냄비를 들여다보던 그 모습이 고요히 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