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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 대신, 갑옷을 만드는 사람이 되길

11년 차 마케터의 업 가치관 정비

by Onda

정답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방향 정도는 아는 사람

이제 일을 쉰 지 두 달 정도 지났는데, 지금 시점에서 커리어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두려 한다. 지금 나를 한 마디로 정리해 보면 ‘정답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방향 정도는 아는 사람’이지 않을까?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큰 방향에서 무엇이 기고 아닌지는 아는 상태. 지금 방향은 안다고 하지만, 내년 초 일을 다시 해야 하는 시점, 새로운 회사를 찾아야 할 시점이 오면 남들의 시선과 불안에 흔들릴 수 있으니, 지금 시점의 생각을 정리해두려 한다.


‘의미’가 가장 중요해졌다

지난 몇 년 간의 경험 때문인지 내가 크게 달라졌다. 지난번 이직으로 이커머스를 선택할 때만 해도 ‘성장’이라는 업 가치관이 가장 중요했다. 계속 성장하지 않으면 커리어가 끊길까 하는 두려움이 컸다. 그래서 계속 성장할 수 있는 환경에 나를 두면서, 내게 맞는 일들을 찾아왔다. 내게 맞는 1) 직무 2) 산업군 3) PLC (Product Life Cycle) 4) 조직문화 순으로 내가 즐겁게 일하면서도 성장하고 싶은 영역을 찾아왔다. 점점 더 내게 맞는 일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5), 6), 7)에 해당하는 기준이 생겨날 줄 알았다. 그런데 이커머스에서 일했던 시간들 때문인지, 이제 내가 아이 엄마가 되어서인지, 글 쓰는 내가 커져서인지 원인을 하나로 정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 내가 묻지 않던 질문들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성장해서 뭐 할 건데?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그렇게 새로운 업 가치관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가 찾아왔다. 성장이냐 의미냐 자신의 근간에 있는 가치관은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닌 것 같다.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성장해서 뭐 할 건데?’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같은 질문들이 스스로 들고, 그 질문에 답을 찾아나갈 뿐이다.


나는 갑옷을 만들었나, 화살을 만들었나

왜 갑자기 의미를 묻게 되었나 생각해 보면, 내가 어느 순간 화살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깨달아서였다. 이동진 평론가가 맹자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화살을 만드는 사람이 갑옷을 만드는 사람보다 덜 어질 리가 있느냐. 그런데 화살을 만드는 사람은 자신이 만든 화살이 사람을 해치지 못할까 걱정하고, 갑옷을 만드는 사람은 자신의 갑옷이 사람을 지키지 못할까 걱정하며 일을 한다고 했다. 단순히 화살을 만드는 직업, 갑옷을 만드는 직업으로 나눠지기보다는, 내가 하는 순간순간의 일이 그 맥락 속에서 화살을 만들고 있는지 갑옷을 만들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이커머스로 이직 전 꽃 스타트업에 있을 때만 해도 늘 사람을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일상에서 꽃을 보면서 나를 돌보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모든 활동의 중심에 있었다. 그 고민을 깊게 할수록 브랜드가 커지는 것도 느껴졌다. 그 과정에서 나는 확실히 갑옷을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즐겁게 일하며 성장하던 시기가 지나고, 그 이상의 성장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한 팀이 이끄는 형태로 브랜드를 특정 사이즈까지는 키울 수 있었는데, 그 이상으로 키울 방법은 몰랐다. 이 이상으로 크려면 여러 부서가 동시 다발적으로 끌어야 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해본 적도 없고 본 적도 없어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지금 시점에 그 이상 사이즈로 키우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앞으로 계속 비슷한 사이즈의 회사에서 같은 일만 반복할 것이 보였다. 그래서 더 규모가 크고, 다양한 부서가 이끌고, 데이터 기반의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이커머스로 이직했었다. 한 번 더 성장해야 하는 시점은 맞았고, 그렇게 기존에 시도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곳으로 도전하게 됐었다.


그곳을 선택한 명확한 이유에 맞게 얻은 것도 많다. 어떻게 여러 팀이 협업해서 전체 숫자를 개선하는지 등 이곳을 경험하면서 앞으로 더 오래 커리어를 지속할 방법을 배운 것도 맞다. 하지만 무슨 일을 했나 돌이켜보면 화살을 만드는 일에 가까웠다. 물론 그곳에서도 갑옷을 만드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같은 물건을 팔더라도 그걸 대하는 마음에 따라, 내 마음에 ‘사람’이 있었느냐에 따라 화살을 만들기도 하고 갑옷을 만들기도 하는 것이니. ‘신생 브랜드를 조명해서 키우는 것을 도와야지’, ‘사람들이 더 다양한 브랜드를 발굴할 수 있도록 도와야지.’라는 마음으로 일을 했던 사람도 물론 있었을 테다.

나도 그곳에 있었던 2년 반 내내 화살을 만든 것은 아니겠지만 대체로 사람을 생각하지 못했다. 세분화된 지표가 많아질수록, 그 숫자만 들여다볼수록 사람은 사라지고 숫자만 남았다. 비즈니스적으로는 이 숫자들이 중요한 이유는 명확했다. 고객이 얼마나 우리 플랫폼에 유입하는지, 얼마나 구매하는지 등등 이 숫자들이 높을수록 우리 플랫폼이 투자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그 숫자들을 올리기 위해, 고객을 최근 방문 일수별로 쪼개면서 활동들을 세분화했다. 하지만 그 활동들을 고민함에 있어, 고객이 우리 플랫폼에 들어오는 이유, 그래서 우리가 줄 수 있는 가치가 무엇인지 같은 고민보다는 당장의 숫자를 높이기 위한 이벤트 같은 것에 시간을 쏟을 때가 더 많았다.


물론 나와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고객을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내게는 그런 환경이 고객을 생각하기에 어려웠다. 플랫폼에 오랜만에 돌아온 유저가 우리가 소개하는 브랜드로 삶이 풍성해지려면 무엇을 더 해야 할까? 같은 논의라도 있었으면 이 활동들이 갑옷을 만드는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논의는 없고 고객이 괴로워할지라도, 더 자주 앱푸시든 광고 메시지를 보내야 당장의 숫자 전환이 되니까 숫자를 높이는 활동만 했다. 사람들이 돈을 더 쓰게 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우리 플랫폼에 들어오는 사람 수를 늘리고, 그 사람을 더 자주 들어오게 하고, 한 번 구매할 때 조금이라도 더 많이 사게 할까? 그런 생각만 했었다. 그리고 이게 화살이 아니면 무엇이었을까?


갑옷을 만드는 사람은 일하다 지쳐도, 내가 이걸 만들지 않으면 사람이 다치니까 어떻게든 이 일을 계속할 동기가 생길 수밖에 없다. 화살을 만드는 사람에게는 그 동기가 무엇일까. 일은 힘들고 의미조차 없는 상황에서 나는 지속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이 브랜드가 존재하는 이유, 의미에서부터 출발해서 끊임없이 우리 브랜드가 다르게 해야 할 것들을 생각해 내는 사람인데, 의미를 찾지 못한 채로 숫자를 쪼개고 쪼개면서 원인을 찾고 숫자를 높이는 일은 젬병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더 깊이 사고하고 성장했던 것은 맞지만, 의미 없는 성장을 계속하고 있구나를 깨닫고 괴로워했다. 그리고 그런 괴로운 시간들 끝에 의미 없는 성장을 멈추겠다고 결심했다. 물론 언젠가는 배웠어야 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IT 회사들이 숫자를 더 정교하게 쪼개고 그에 맞게 액션 하면서 비즈니스를 이끌어가니. 이제 수단은 배웠고 그간 정교하게 배운 것을 다시 갑옷을 만드는 일에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의미냐 워라밸이냐

이제 성장보다 의미가 중요해진 내게, 두 가지 갈래가 있다고 생각했다. 1) 내가 생각하기에 의미 있는 곳으로 가거나 2) 차라리 워라밸, 균형이 맞아서 회사 일이 무엇이 되었든 퇴근 후에, 지금의 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글쓰기와 아이를 돌보는데 용이한 곳으로 가거나-글을 쓰고,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에는 이게 무슨 의미냐 같은 질문이 들지 않으니. 그리고 사실 제일 원하는 것은 하루 종일 글만 쓰고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것이니.


하지만 워라밸이라는 게 있기는 한가 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워라밸이라는 요소는 회사 분위기에 달려있는, 내가 컨트롤하지 못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무리 워라밸이 맞춰진다 한들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에서 하는 일이 의미 없다면 내가 그걸 견딜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음 회사는 무조건 의미이고, 나를 관통하는 키워드 ‘나답게 살기’, 나답게 일하고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곳, 나의 일상을 회복하는 것 - 마음 건강, 셀프케어 등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회사로 가야겠다 생각했다.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 당장 오늘부터 의미 있으면서, 나중에 사업을 하더라도 이 방향으로 하고 싶으니, 내 미래에 도움 되는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정리했다. 그래서 회사의 네임밸류든 사이즈든 그런 남들의 시선에 해당하는 것들은 내려놓고, 내가 의미 있다 생각하는 인더스트리라면 작은 회사라도 상관없고, 더 나아가 마케터가 아니어도 상관없겠다는 생각까지 한다. 하지만 내가 가장 잘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마케팅이니 마케터를 하고 있겠구나 생각 정도다. 이제는 마케터로서의 커리어보다, 내가 어떤 문제를 풀고 있는지가 더 중요해진 단계에 왔구나 싶다.


나에게 다시 속지 않길

이렇게 의미가 제일 중요하다고 정리했음에도, 다시 선택할 시점을 생각하면 흔들린다. 그래도 돈은 지금처럼 벌어야 할 텐데. 진짜 네임밸류 내려놔도 되겠어? 등등의 질문들. 그 질문들에 휘둘린다면 결국 화살을 만들지도 모르는 곳에 갈 수도 있는데 이를 잊고 만다.

올해 있었던 어느 날을 다시 생각해 본다. 친구와 저녁에 만나기로 했지만 오늘 해야만 하는 일은 끝날 기미가 없고, 그럼에도 나는 이 힘듦을 털어놓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상황까지 와서, 친구가 결국 회사 앞까지 찾아왔었다. 9시는 훌쩍 넘은 시간에 친구에게 버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며 몇 개월째 반복해 왔던 이야기를 다시 반복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순간을 기억한다. 돈만 생각하거나, 남들의 시선에 휘둘린다면 다시 그런 날들의 반복일 뿐이니 이제 속지 않으려 한다.


이제는 내 대부분의 시간동안 하는 일과 내가 쓰는 이야기가 일치되는 삶을 살고 싶다. 그동안은 내 대부분의 시간은 화살을 만드느라 괴로워하고, 겨우 만들어낸 여분의 시간에는 나를 지키고 싶다는 이야기를 해댔다. 이제 내 유일무이한 기준 하나는 ‘의미’다. 내가 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 사람을 위하는 일이면서, 특히 일상 회복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 그다음 기준은 아직은 없다. 의미라는 기준에 맞춰서 일을 선택해 보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니, 앞으로 새롭게 만들어 가지 않을까.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은 단 하나, 내가 만든 것이 화살이 아닌 갑옷인지 매 순간 묻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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