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by 승아

열일곱, 겨울이 참 미웠습니다. 새해에 대한 기대와 생일의 기쁨으로 가득해야 할 1월, 심한 두통과 구토, 이명과 복통이 심해서 종합검사를 했지만, 아무 이상도 없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어디가 잘못된 건지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사실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손끝 하나 움직이기 힘들었습니다. 침대와 몸이 강력한 접착제로 붙어있었습니다. 아무리 울어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엄마의 권유로 심리검사를 받으러 가기로 했습니다. 이상한 사람들이나 가는 곳이라 생각했던 정신과에 내 발로 걸어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며칠 후에 나온 결과지에는 우울증 소견이 적혀있었습니다. 믿기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며 부정했고 고등학교 교복을 맞추면서도 설레기는커녕 우울하기만 했습니다. 괜찮아질 거라는 다짐도 끊임없이 흔들리기만 했습니다.


3월, 새로운 친구들과 만나 즐거운 나날을 보내려 애썼지만, 우울은 나를 잠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일본어 선생님의 농담에 친구들은 깔깔대며 웃고 있었습니다. 그날이 며칠이었는지, 날씨가 어땠는지, 선생님이 무슨 농담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홀로 멈춰진 시간에 존재하는 기분이 들었던 것만이 생각납니다. 심장은 터질듯했고 숨이 가빴습니다. 식은땀도 줄줄 흘렀습니다. 얼마 후, 공황장애까지 진단받고 말았습니다. 뭉게구름이 떠 있는 시리도록 눈부신 하늘 아래서 정이 들어버린 친구들과의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고작 4개월 동안의 고등학교 생활이었습니다. 그날이 쓰라린 나날들의 시작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금방 괜찮아질 줄 알았습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약을 먹고, 매주 토요일에 심리 상담을 받았습니다. 견디기 힘들 때마다 여행을 떠났습니다. 요가와 필라테스로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체력을 길렀습니다. 손을 쓰는 취미 생활도 가지면 나아질 것 같아서 라탄 공예와 터프팅을 시작했습니다. 나무줄기를 엮는 동안에는 복잡한 생각이 사라졌고 터프팅건을 쏘고 있으면 스트레스도 풀렸습니다.

계절은 어느새 겨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애써 외면해 오던 우울이 다시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온몸을 찰흙으로 뒤덮은 느낌이었습니다. 돌덩이처럼 굳은 마음은 기쁨과 설렘은 물론 불안이나 분노, 심지어 우울조차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깨어나지 못하는 시체처럼 자고 또 자기만 했습니다. 하루에 한 번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벅찼으니, 바깥에 나가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손목을 긋고 말았습니다. 피가 나는 따가운 손목에 마음이 덜 아팠습니다. 한 달 치 약을 스무 번에 나누어 삼켰습니다. 오히려 위세척할 때 죽는 줄 알았습니다. 30층은 족히 될 오피스텔 옥상 난간에 매달리기도 했습니다. 공황장애 때문에 구급차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흉기였습니다. 열여덟이 되던 해 여름, 한 달 동안의 입원 생활을 했지만 퇴원 후 나아졌다는 착각 속에 살았습니다. 우울과 불안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 믿었고 괜찮아진 줄 알았습니다. 사실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뿐이겠지요.


바글바글한 사람들 속에서 다시 공황이 찾아왔습니다. 결국 재입원을 했습니다. 이번엔 폐쇄병동이었습니다. 음침하고 무서운 곳인 줄 알았습니다. 20대로 보이는 언니와 백발의 할머니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이름이나 나이, 직업 같은 식상한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뭐가 그리 힘들었어요?" 그 말 한마디에 눈물이 터져버렸습니다. 조금씩 병동 생활에 적응하면서 다른 환자들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단지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었을까요. 요동치던 마음은 잔잔해져 갔습니다. 병실 창문 쇠창살 너머 흩날리는 낙엽을 바라보다 문득, 사랑하는 사람들과 남은 스무 살을 누리고 싶었습니다. 나의 우울을 받아준 부모님, 그동안 보지 못한 친구들, 믿고 기다려준 애인과 소중한 추억을 쌓고 싶었습니다.

우울과 불안으로 망가진 나를 보았지만, 지금은 나를 상처 입혔던 날들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우울과 함께하기에 평범한 날에 그토록 행복해합니다. 불안이 찾아오기에 살아내고 있는 오늘 하루가 소중합니다. 이제는 두렵지 않습니다. 우울과 불안을 나의 것으로 만들었으니까요. 어떤 파도가 찾아오던 그곳에서 기쁨을 찾아내려 애쓰며 매일을 살아갑니다. 그렇게 살아냅니다.


어쩌면 이번 겨울에는 따끈따끈한 붕어빵을 먹고 싶어 질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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