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이 찾아온 겨울

뭐, 내가 우울증이라고?

by 승아

세상이 온통 하얀색으로 뒤덮인 화요일. 눈 부신 햇살이 나를 깨우지만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다. 눈을 떴지만, 허공만 바라보다 다시 감는다. 머리는 깨질 듯이 아프고 귀가 찢어질 듯한 이명에 도통 잠에 들 수가 없다. 미치겠다. 귀를 꽉 막고선 얕은 신음을 낸다. 이 아픔을 이야기하자면 과거로 돌아간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시도 때도 없이 두통이 있었고 베개에 머리만 대면 삐- 하는 소리가 울렸다. 밥만 먹으면 토했고 생리도 아닌데 배가 심하게 아팠다. 지난주 목요일, 학교를 빠지고 대학병원에 가서 수면 검사, 난청 검사, 뇌 MRI, 위내시경을 포함한 정밀검사를 받았지만, 결과는 지극히 정상이었다. 분명 아무 이상이 없다는데 몸이 좋지 않다. 아니면 이렇게 아플 리가 없다. 죽을 듯이 아파도 지금 의지할 수 있는 건 진통제뿐이다. 무거운 몸으로 진통제를 먹기 위해 거실로 나가는데 엄마가 손수 끓인 떡국 냄새가 거실에서 진동하지만, 입맛이 없다. 엄마는 또 약을 삼키는 나를 보면서 걱정되는 눈빛을 하고는 한숨을 푹 쉰다. 떡국은 조금 있다가 먹겠다며 애써 괜찮은 척하며 미소를 띤다. 방에 들어와 다시 침대에 눕는다. 잠시 쉬고 싶었는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문을 열고 들어온 엄마의 근심 가득한 표정에 순간 짜증이 치밀어 ‘왜?'라고 내뱉고 말았다. 엄마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입술만 깨물고 있다. 한참을 망설이고만 있기에 몸을 일으켜 엄마와 눈을 맞춘다.


“승아야. 승아가 요즘 몸이 아파서 엄마도 속상한 거 알지?”

“응….”

“근데 또 몸에 이상은 없다고 하고…”

“응….”

“승아가 아프다는 곳들 정보도 많이 찾아보고 깊이 생각하고 하는 말인데,

승아가 이유 없이 몸이 아픈 건, 마음이 아파서 그런 것 같아….

혹시 승아도 생각해 보고 괜찮다면 정신건강의학과를 가서 검사를 한번 받아볼래?”

“….”


눈물이 글썽이는 나를 엄마가 꽉 안아준다. 젠장. 또 운다. '승아 곁엔 엄마가 있잖아. 엄마한테 기대서 울어도 돼.' 엄마의 따스한 마음이 느껴진다. 엄마의 어깨가 내가 흘린 눈물과 콧물로 흠뻑 젖어버렸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천천히 생각해 보고 병원 갈 용기가 생기면 꼭 말해줘. 일단 좀 쉬어." 어떤 용기가 생겼던 걸까. 무슨 마음을 먹었던 걸까.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걸 스스로 느끼고 있었던 걸까.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엄마의 손을 붙잡고 "엄마, 나 검사 받아보고 싶어" 말해버리고 말았다.


엄마는 곧바로 전화를 걸어 서울 강남세브란스 병원 정신건강의학과에 진료 예약을 했다. 고작 사흘 후였다. 엄마에겐 당당하게 가겠다 말했지만, 사흘 동안 별별 생각을 다 했다. 정신과가 내가 가도 되는 곳이 맞는 걸까? 가서 검사를 했는데, 안 좋은 결과가 나오면 어떡하지? 만약에 뭔가 나오면 내가 정신과 약을 먹는 건가? 약에 중독되면 어떡하지? 약은 평생 먹어야 하는 건가? 거기에 갇히는 건 아닐까? 그렇게 예약 당일. 오늘이 오지 않길 바라고 바랐건만 결국 해는 뜨고 만다. 아침부터 느릿느릿, 시간을 끌며 늦장을 부린다. 눈은 떴지만 이십 분 동안 누워서 폰만 만진다. 겨우 일어나서 양치질도 느리게, 옷은 검정 코트를 입을지 패딩을 입을지 십 분간 고민하다 결국 패딩을 입었다. 신발이 사라졌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신발장에 선다. 사라지지 않은 운동화를 신자 내 앞엔 거대한 대학병원이 턱 하니 서 있고, 그제야 더는 외면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건지 아랫배가 조여온다.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안절부절못한다. 뻣뻣하게 병원을 헤매다 겨우 찾은 접수처. 잠시 대기하라는 간호사의 말에, 이제야 엉덩일 붙이고 앉아 숨을 돌린다.


검은색 쿠션이 깔린 회색 의자. 쿠션 질감을 손톱으로 깔짝대다 가만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이 꽤 많네…. 대학병원이라 그런가. “과자-! 아, 과자아-!” 과자를 달라며 떼를 쓰는 아이와 무덤덤한 여자. 아이가 아픈 걸까, 엄마가 아픈 걸까? “응, 아들. 점심 거르지 말고.” 자식에게 끼니를 챙겨 먹으라며 통화하는 저 아주머니는 말짱해 보이는데‥. 하지만 검정 체크무늬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저 아저씨는 내 눈에도 어딘가 아파 보인다. 그 옆, 휠체어에 앉아 계신 할머니…. 아니, 어쩌면 그 휠체어를 끌고 온 아들이 아픈 걸까? 정신과에 오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고 다양하다니…. 미처 몰랐다. ‘강승아 님~‘ 진료실에 들어가라는 간호사의 부름에 심장이 두 배속으로 뛰기 시작한다. 문고리를 붙잡고 잠시 머뭇거렸지만 두 눈 질끈 감고 문을 연다. 잔뜩 긴장했건만 진료실 풍경은 너무나 평범했다. 부드럽게 굴곡진 형태의 책상과 푹신해 보이는 갈색 의자에 마음이 놓인다. 창문 앞에 있는 베이지색 서랍장 위에는 일정이 잔뜩 표시된 탁상 달력이 놓여 있다. 어깨를 한껏 움츠리고 달력과 눈싸움을 하고 있는데 의사가 말을 건넸다.


"지금 기분이 어떠세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미간을 찌푸리며 손톱을 괜히 만지작거리다 입을 열었다. “몸이 제 몸 같지 않고 이게 대체 무슨 감정인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의사는 미소를 띤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계속했다.


-요즘 힘든 일이 있었나요?

-아니요…. 무기력한 게 힘들어요.

-밥은 아침 점심 저녁 잘 드시나요?

-입맛이 없어서 하루 한 끼 겨우….

-잠은 보통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주무시죠?

-새벽까지 울다가 지쳐서 잠들면 서너 시간 자는 것 같아요….


가까스로 의사의 질문에 답하자 간호사의 지시에 따라 검사를 받으라 한다. 간호사가 종이 한 뭉치를 들고 온다. 질문지다. 천천히 해도 좋으니, 답안을 적으란다. '기분이 울적하다.' 음…. 아주 심하다. ‘나는 불안하다.’ 어…. 나 불안한가? ‘손이 자주 떨린다.’ 손이 떨린 적이 있나? 답안을 모두 채우고 나니 힘이 쭉 빠져버렸다. 질문지를 건네받은 간호사는 다른 검사가 남아 있다며 맨 끝 방 검사실에 들어가라고 한다. 최면술을 할 때 쓸 것 같은 의자에 앉으니, 긴장이 풀렸나 보다. 편하다. 하지만 슬슬 겁이 나기 시작한다. 간호사 두 명이 들어와 선이 연결된 모자 같은 걸 머리에 씌우고 무슨 패치 같은 걸 팔에 붙인다. 도대체 뭘 하는 건지 궁금한데 거울이 없어 보이지 않는다. 이십 분쯤 지났을까? 수고 많았다며 나가서 수납하라는 말에 이제 끝인가 싶은 마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뇌파 검사였다. 지칠 대로 지쳐 집으로 돌아와 뻗어버렸지만, 도통 잠에 들 수 없었다.


일주일 후 결과를 듣기 위해 다시 병원을 찾았다. 그때 의사가 지었던 미소는 온데간데없다. 한껏 어두운 표정으로 "강승아 님은 우울감이 커서 우울증을 의심해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약을 먹어보고 상담도 병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치 내 인생이 끝났다는 선언처럼 들렸다.

뭐, 내가 우울증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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