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더는 연락 하지 마세요!

출가외인이 되어야 했던 이유

by 원빌리


아빠! 더는 연락 하지 마세요!


2022년 찌는 듯한 여름, 둘째가 15개월쯤 되었을 때의 이야기다.


그때 나는 아빠에게 미운 정도가 차올라, 이제는 더는 참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야 셀 수 없이 많았지만, 그래도 아빠라는 인연을 유지했던 이유는 아빠와 함께 사는 엄마가 불쌍했고, 우리에게 가정폭력을 저질렀지만 쉬지 않고 일했으며, 나를 낳아준 사람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



2018년, 찌는 듯한 여름. 결혼식 청첩장을 드리기 위해 잠시 고향집을 방문했다.


“아빠, 엄마! 저 왔어요!” 하며 힘차게 들어섰지만, 부모님은 세상 다 잃은 표정으로 서로 싸우고 계셨다. 마치 어린 시절 새벽마다 싸우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무슨 일인가 들어보니, 친오빠의 전역을 앞두고 아빠가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내 청첩장을 받자마자 구기면서 한참 오빠 욕만 했다.



그 새끼는 전역해서 고생 좀 해봐야 돼! 내 말 안 듣고 전역하니까 망해야 해!


순간 나는 충격을 받았다. 저 말이 정말 우리 아빠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인가? 잠시 잊고 살았지만, 맞다. 그게 바로 우리 아빠였다.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갔지만, 한 가지는 명확히 알았다.
아빠에게 자식이란, 자기 말을 잘 듣고 잘 나가는 자식만 인정받는 존재였다.


나는 이 집의 딸로서는 더 이상 살고 싶지가 않다.


그날과 다음 날, 집에서 어떤 정신으로 있었는지 기억조차 희미하다.


후다닥 옷을 챙겨 신혼집으로 향했다.

그 뒤 들려온 엄마의 소식에 따르면, 오빠의 자동차 보험이 아빠 명의로 되어 있어 저렴하게 운전자 보험을 쓰고 있었는데, 아빠는 오빠의 모든 것이 꼴 보기 싫다며 해지를 통보했다고 한다.



*



오빠는 전역 후 결혼하여 공기업 준비 중이라 한 푼이 아쉬운 힘든 상태였고, 나는 그런 오빠가 늘 안타까웠다.

이제 확실히 깨달았다. 30년 동안 나는, 그리고 오빠는, 저런 부모 밑에서 살아온 불쌍한 존재였구나.


아빠는 내가 20살이 되어 타지로 간 순간부터, 청첩장을 주러 간 날까지도 전화로 욕을 퍼부었다. 주말마다 술에 취해, 내가 평일에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불만을 쏟아냈다.
나는 말했다.

"아빠, 저도 평일엔 일을 하는데 전화를 낮에 어떻게 받나요?"

백 번 말해도, 만취 한 아빠는 욕만 할 뿐이었다.

2022년 여름, 결국 전화 너머로 계속 욕을 듣다가 나는 소리쳤다.



아빠! 우리 인연은 여기 까지에요. 잘 지내세요!


그리고 연락처를 열어 차단 버튼을 눌렀다. 통화 기록에도 남지 않게 설정했다.
울먹이는 내 모습을 보던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부끄러워 남편 휴대폰에서도 똑같이 차단했다.

"자기야, 앞으로 우리 집에 안부전화도 할 필요 없고, 방문도 안 할 거야. 그렇게 알아."

내가 부모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불효이자 복수는, 손자를 보여주지 않는 것이었다. 어차피 아빠는 손자가 몇 월에 태어났는지도 관심 없으면서, ‘할아버지’라는 타이틀만 원할 테니.

부모와 사이가 좋지 않으면, 그냥 안 좋은 대로 지낼 뿐이다. 돌아가시게 되더라도 후회는 하겠지만, 좋은 기억으로 내 머릿속에 남는 것도 나쁘지 않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나는 한때 엄마가 가엾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엄마는 이혼하지 않고 자녀에게 죄책감을 주며 가스라이팅을 하고 있었다.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더 이상 저희 죄책감을 핑계 삼지 마세요. 이혼하신다면 법적 지원 해드릴게요.

엄마는 아빠 편을 들며 "너무 하다"라고 말했다. 어릴 적에도, 지금도, 부모는 나에게 혼란과 상처를 주었다.



이제 나는 내 가정에만 충실하면 된다.
엄마도 엄마의 가정에 충실하다.



나는 엄마를 이해하기로 했다.

이 선택은 단순히 부모를 끊는 것이 아니라, 나와 내 가족의 평화와 안전을 지키기 위한 결단이었다.



이제 남은 건, 내 가정을 지키고, 내 아이를 보호하며 살아가는 것뿐이다. 그렇게 나는 출가외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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