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인연을 쓰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남은 온기

by 기록하는여자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한다.
이 글은 마흔의 시간을 건너는 한 여자의 이야기다.
누구의 아내로, 딸로, 며느리로, 엄마로 살면서
또 한 사람의 친구로, 누군가의 지인으로,
수많은 이름 뒤에 나를 감추며 살아온
어느 평범한 주부의 마음 기록이다.

삶을 한 겹씩 벗겨내다 보면
결국 남는 건 '사람'이었다.
가족, 친구, 지나간 시간 속에서
문득 마주친 누군가.
우연처럼 스쳐 지나갔지만
마음에 오래 남은 사람들.
그들을 '인연'이라는 이름으로 불러본다.

마흔을 사는 내가 지금껏 보고, 느끼고,
지나온 길마다 잊은 줄 알았던 누군가는
작은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그 흔적은 때로 나를 웃게 했고,
어떤 기억은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인연들이 나를 조금씩
단단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
사는 게 결국,
사람을 기억하는 일이라는 걸.

나는 지금,
지나온 시간 속 마음에 남은 인연들을
천천히 불러보려 한다.

사춘기 딸의 엄마로,
한 사람의 아내로,
홀로 계신 엄마의 딸로,
누군가의 며느리로,
누군가의 친구이자 지인으로,
그렇게 여러 이름으로 살아온 나.
그 이름들 속에서 지우지 못한 마음들을
한 자 한 자 꺼내 적어보려 한다.

혹시 당신도 그런 적 있지 않은가.
어느 날, 문득 떠오른 이름 하나에
가만히 마음이 젖어드는 순간.
그때의 향기, 그날의 표정,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던 온기.

이 글은 그런 기억들을 위한 것이다.
다정한 사람의 말 한마디,
늘 제자리에서 기다려주는 가족의 품,
어린 날 나를 안아주던 누군가의 손길까지.

이야기를 쓰다 보면
잊은 줄 알았던 마음이
조용히 말을 건넨다.

나는 그 목소리를 놓치고 싶지 않다.
그러니 천천히, 조심스럽게
적어 내려 보려 한다.

이 이야기를 읽는 당신의 기억 속에도
따뜻한 이름 하나 떠오르기를 바라며.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당신도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은 인연이기를.



이 글들은 모두,
인연을 돌아보며 써 내려간
지난 계절의 기록입니다.






월요일 아침,
한 주를 시작하는 분주함 속에서
문득, 지나간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지난주 목요일, 남편은 독감 양성 판정을 받고 며칠간 격리 생활을 했다.
그는 오늘 아침, 조금은 무거운 몸으로 출근했고
나는 그가 사용했던 방과 화장실을 소독하고,
빨래를 두 번 돌린 후에야 비로소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따끈하게 끓인 소고기뭇국 한 그릇.
숟가락을 들고 잠시 앉은 그 찰나,
선명하게 떠오른 아버지의 모습.

'맞다, 아빠는 이 국을 좋아하셨지..'

소고기와 무가 푹 우러난 국물,
그 안의 따스함을 한 대접 가득 담아 드시던 모습.
입가엔 늘 온화한 미소가 번져 있었고,
그 미소 너머로 할머니를 바라보며
"잘 드셔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니"
말씀하시던 그 장면까지 또렷이 떠올랐다.

아빠는 참 효심 깊은 분이셨다.
그렇게 곁을 따뜻하게 데우던 사람이셨다.

지난 2월,
할머니가 먼저 세상을 떠나셨고
그로부터 단 13일 뒤, 아빠도 그 길을 따라가셨다.

나는 평소 스스로를
효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생각하며 살았지만
요즘 부쩍 그리움이 잦아졌다.
아무도 없는 집,
고요한 오전의 공기 속에서
아빠를 떠올리며 마음껏 슬퍼할 수 있었다.

삶은 매일 바쁘게 돌아가지만
이따금, 아주 평범한 순간에
기억은 불쑥 찾아온다.

그건 마치
따뜻한 국물 한 숟가락처럼,
서늘했던 마음에 잔잔한 물결을 번지게 한다.

나는 그 기억 속에서
아빠의 온기를 다시 느낀다.
그리고 다짐한다.

아빠처럼,
누군가에게 고마움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아빠!

그곳에선 편안하신가요?

부디 다음 생에는 부잣집에서 태어나셔서
고생하지 마시고,
동생들에게 양보하느라 못하셨던
하고 싶으신 공부 마음껏 하시고,

이번 생처럼 병으로 고통받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심정지나 뇌사 상태로
힘겹게 떠나시는 일이 아니라,
건강하게 생을 마감하시며
주무시듯 편하게 가세요.

이번 생에 아빠의 딸로 태어나
효도도 제대로 못하고,
호강 한 번 시켜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아빠,
부디 그곳에서는 꼭 행복하세요.

저를 이 세상에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사랑합니다.

안녕,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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