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장편소설(유리병 레몬사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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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국민 학교 때는....... 이라고 말하면 그건 일제의 잔재라며 바른 명칭을 쓰라고, 상식 없는 사람 취급을 한다. 그래서 나 초등학교 때는....... 정정해 말하면, 네가 무슨 초등학생이었냐? 국민 학생이지! 왜 어린 척 해? 놀림을 받는다.
나는 국민 학교 마지막 세대이다. 6학년 졸업을 할 무렵, 이젠 국민 학교, 국민 학생은 없다고 했다. 앞으로는 초등학교. 초등학생으로 부른다고 했다. 한동안 내가 국민 학생인지 초등학생인지 아리송했고. 한 술 보태 조금 엄살 부려 표현하자면, 꾸역꾸역 쌓아놓은 6년이 송두리째 날아가는 허무함도 느꼈다. 하필이면 나이까지 빠른 년생이라, 물에 붕붕 뜬 기름처럼 겉도는 기분은 인생 전반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시대는 우리를 끼인 세대라고 불렀다.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함. 위에서 누르고 아래에서 밀어내는 천덕꾸러기 84년생. 그렇지만 좋은 것도 참 많았다. 뇌가 아주 말랑말랑할 때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걸 지켜봤고. 라디오에 낭만과 팟캐스트에 편리함을 두루두루 섭렵했으며. 워크맨, 시디플레이어, 엠피쓰리까지 다 활용해 봤다. 가장 활기차고 신기했던 미지의 밀레니엄 2000년도를 제일 예쁜 나이로 원 없이 누려봤기 때문에. 그래서 나름 만족을 하며 살고 있다.
딱 두 가지만 빼고! 첫 번째는 자궁과 생리통! 나의 자궁 일명 자순이는 한 달에 한번 많이 슬퍼한다. 엉엉 쉬지 않고 울어댄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극심한 통증으로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다. 자순이도 나도 한 달에 한 번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울어댄다.
두 번째는 열두 살 5학년 때의 기억이다. 그때 우리 집은 가난했다. 엄마의 교통사고로 보상금을 받아 용산에 판잣집을 샀지만, 부모님의 직업을 바꿀 정도로 형편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재개발로 건물주가 되기 전까지는 오래도록 청소노동자였고, 공사장 인부였다.
부모님은 새벽에 나가 깊은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가난 때문에 부모님과 함께 있는 시간이 부족해 아쉬웠지만, 그렇다고 불편하거나 괴로울 정도는 아니었다. 외동딸에 대한 부모님의 남다른 사랑이 가난이라는 결핍으로부터 보호해 줬기 때문이다. 설탕 장미꽃이 올려 진 버터크림 케이크가 점점 사라지고 생크림케이크가 유행할 때, 엄마는 생과일이 가득하고 우유 맛이 기가 막힌 비싼 케이크를 사줬고. 학원도 남들 가는 것만큼 보내줬다. 고장 난 멜로디언에 호스를 연결해 불고 있는 내가 불쌍했던 아빠 박수원씨는 전자상가에 데려가 전자 건반을 사줬다. 당장 내일 먹을 쌀이 없어도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원하는 건 다 들어줬다. 그러나 아무리 부모님이 피나는 노력을 해도 사람들은, 특히 학교는 기가 막히게 우리 집의 가난을 찾아냈다.
5학년 때 담임. 마귀할멈 서 씨. 무서운 건 다 붙여 부르던 국민 학교 담임선생님. 요즘은 학생이 갑이고 선생이 을인 참 이상한 시대가 됐지만, 그때는 선생님께 돈 봉투를 조공하듯 바치고, 스승의 그림자라도 밟으면 싸다구를 맞는 시절이었다. 실명 보호법 때문에 이름을 밝히지는 않겠다만, 서 씨 성을 갖고 있던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아버지가 교수님인 전민영을 예뻐했고. 학부모회 회장 엄마를 둔 소윤혜를 총애했으며, 가난하고 공부 못하는 애들은 무시하고 구박하던 못된 인간 말종이었다.
그 여자 때문에 나는 등교하는 아침마다 괴로워했다. 특히 수학이 들어간 요일은 정말 죽고 싶었다. 칠판 앞에 가득 쓰여 있던 난해하고 무서운 숫자들. 유독 공부 못하는 애들만 불러내서 풀게 했다. 그날도 분필로 녹색 칠판에 점을 찍고 있는데, 별안간 날아든 주먹에 내 작은 몸은 앞문까지 날아갔다. 쓰러진 나를 일으켜 억지로 옷을 벗기려 했던 흉악한 여자. 벌벌 떨면서 바지춤을 붙잡고 눈물만 뚝뚝 흘렸던 처절한 기억. 그런 장면을 사라지지 않는 기억으로 만들어준 서 씨의 만행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한강 국민 학교 5학년 7반, 모두 주목! 학교에서 자선단체에 물품을 기증할 거야. 그러니 집에서 쓸 만한 물건 꼭 챙겨오고, 우리 소윤혜랑 민영이는 안 입는 옷 있으면 가져오도록!”
다음 날, 칠판 아래에는 책이며 장난감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교탁 위에는 다양한 헌 옷들로 작은 동산이 솟아 있었다.
“이경순, 박현조 나와서 받아 가! 그리고 윤혜랑 민영이에게 고맙다고 해라!”
지들이 가져온 헌 옷을 하나씩 들고 자리로 돌아가는 나와 경순이를 향한 환멸과 무시 가득한 시선들. 우월감에 가득 찬 소윤혜의 도도한 미소와 여유롭고 거만했던 전민영의 표정. 교탁 위에 쌓인 옷들을 뒤적거리던 담임의 교활한 입술. 지금도 악몽처럼 남아있다. 그날 저녁 담임에게 받은 소윤혜의 헌 블라우스를 발견한 엄마가 이게 뭐냐고 물었다. 열두 살의 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어내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이 현조가 예쁘다면서 주셨어.”
순간 나는 보았다. 고단한 노동자의 얼굴에서 환한 희망의 태양이 빛나는 것을.
“바빠서 학교에도 못 가보고, 선생님 팬티 한 장 안 사드렸는데도, 우리 현조를 예뻐한다고?”
엄마는 급기야 눈물을 글썽였고, 아빠는 흐뭇하게 웃었다. 내 머리를, 내 뺨을, 어루만지고 쓰다듬던 거칠고 상한 그 손길들 역시 악몽 같은 기억 옆에 고스란히 자리 잡고 있다. 나는 부모님이 나의 말로 인해 울기보다는 웃기를 바랐다. 그게 설령 거짓말일지라도 말이다.
“엄마! 아빠! 선생님은 늘 책상 위에 레몬 사탕이 들어있는 유리병을 놓아두거든요? 그 사탕은 아무나 먹는 게 아니에요! 선생님이 사랑하는 아이들만 먹을 수 있어요! 현조는 매일매일 그 사탕을 먹을 수 있어요!”
그러면 아빠는 까만 흙이 박혀있는 손으로 내 볼을 감싸면서 말했다.
“나의 태양! 박현조! 너는 어두운 밤하늘이 아니야. 내 딸은 아침 해처럼 밝고 환하지.”
그래서 나는 부모님 앞에서는 절대로 달이 되지 않았다. 늘 태양처럼 환하게 빛나려고 노력했다. 비록 한 달에 한번 너무 일찍 찾아온 여자의 고통으로 배를 잡고 아파해야 했지만, 아픈 밤이 지나고 나면 부모님을 향해 밝고 환하게 거짓말을 했다.
“아빠! 현조는 학교 가는 게 참 좋아!”
거짓말이다.
“엄마! 선생님이 현조 참 예쁘데.”
거짓말.
“아빠! 현조는 친구가 엄청 많아! 내가 재밌데.”
이것도 거짓말.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이 생일 파티를 열어준다면서 친구들을 초대하라고 했다.
“불쌍한 현조, 생일이 겨울방학이라 친구들을 초대할 수 없었지? 친구들 다 불러!”
모든 게 들통 날 위기가 온 것이다. 나는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었기 때문이다. 교실의 여왕이 때리고 구박하는 아이와 친구가 되려는 애들은 없었다. 1교시가 끝나고 책상에 얼굴을 묻고 다리만 덜덜 떨고 있을 때, 누군가 얇은 손가락 끝으로 내 손등을 ‘톡 톡 톡’ 건드렸다. 부스스 일어나 얼굴을 들어보니 나와 같이 담임에게 미움 받는 쌍두마차 구박덩어리, 여름에는 하복체육복, 겨울에는 동복체육복에 할머니들이 입는 보라색꽃무늬 조끼를 입고 다니는 가난하고 부모 없는 아이. 요즘은 담임선생이 준 헌 옷을 열심히 입고 다니는 이경순이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그 아이를 멀뚱하니 쳐다보았다.
“이거.”
이경순은 살포시 웃으며 허옇게 트고 갈라진 손등을 뒤집었다. 그리고 천천히 손바닥을 펼쳤다. 그 안에는 담임 의 레몬 사탕이 놓여 있었다.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눈만 껌뻑이며 레몬사탕과 이경순을 번갈아 바라봤다.
‘쟤가 어떻게 저 사탕을 가지고 있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경순은 곧 손을 내 코앞까지 내밀며 조용히 말했다.
“너 먹어.”
반쯤 몸을 일으키며, 멍한 얼굴로 물었다.
“왜?”
“너도 한 번도 안 받아 봤잖아. 윤혜 자리에 떨어져 있었어. 몰래 주웠어. 많이 먹어서 질렸나 봐. 나 같으면 필통 속에 고이 보관할 텐데.”
이경순은 침을 한번 꿀꺽 삼키면서 레몬 사탕을 마치 금덩이라도 되듯 응시했다.
“현조야. 이 레몬 사탕, 너 주고 싶어.”
시장 한 귀퉁이, 고무대야를 앞에 두고 생선을 팔던 등이 굽은 할머니의 손녀. 가난하고, 공부도 못하고, 머리는 늘 감지 않아 떡이 져 있던 아이, 이경순.
하위 등급 안에서도 등급은 또 나뉘어 있었다. 그래도 나는, 최소한 이경순 보다는 몇 등급 위일 거라는 발칙한 생각을 했었다. 그렇지만 경순이가 내미는 그 레몬사탕이 너무나 갖고 싶었다. 반지의 제왕에서 절대반지처럼 말이다. 머릿속에선 ‘마이 프레셔스’하고 음침하게 속삭이며 레몬사탕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지만, 현실 속 박현조는 입도 벙긋 못한 채 손가락만 꼼지락거릴 뿐이었다. 곧 머쓱해진 경순이가 동그랗게 말린 내 품 안에 사탕을 툭 던져 넣고 돌아섰다. 조금씩 경순이 뒷모습이 멀어지던 그때.
“야아....... 이 경 순.”
그 아이를 불렀다. 내 쪽으로 걸어오는 이경순은 소윤혜가 버린 치맛단이 뜯어져 올이 풀린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런 아이와 친해지고 싶지 않았지만, 청소일 까지 쉬면서 상다리가 부러지게 음식을 차려놨을 엄마 얼굴이 떠오른 나는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우리 집 올래? 내 생일인데.”
“응! 갈게!”
이경순은 일초 만에 대답을 하며 환하게 웃었다. 언제? 몇 시에? 장소는? 이런 질문도 없이, 강아지 인형처럼 빠르게 머리만 끄덕이는 이경순 모양이 우스워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럼 방과 후에 교문 앞에서 만나자.”
경순이는 세상 다 가진 표정을 지으며, 재빨리 제 자리로 가더니 공책을 북 찢어서 얼마 없는 색 볼펜을 바꿔가며 무언가를 열심히 써 내려갔다. 잠시 고민을 하더니, 필통을 꺼내 길이가 제일 긴 연필을 종이에 감싸기 시작했다. 속으로 ‘저걸 선물이라고? 차라리 주지 마.’ 투덜거렸다. 어쨌든, 그날 저녁 엄마가 정성스레 차린 대여섯 사람 분량의 음식을 대접받은 경순이는, 정신없이 그 음식들을 메뚜기 떼처럼 해치웠다. 엄마는 그런 경순이가 예뻤는지, 접시가 비워질 때마다 다시 채워주었다. 한참을 정신없이 먹던 경순이가 갑자기 일어나, 집에 다녀온다고 했다.
“조금 더 있다가 가련, 곧 케이크가 올 건데.”
“완전히 가는 거 아니 구요, 뭐 좀 두고 와서요.”
잠시 후, 이경순은 검은 봉투를 들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돌아왔다.
“죄송해요. 현조 선물을 못 사서요. 할머니가 고등어 물이 좋다고 드리랬어요.”
엄마는 고등어가 참 신선하다면서, 경순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곧 초록색 케이크 상자를 든 아빠가 도착했고, 토끼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경순이는,
“케이크는 처음 먹어봐요!”
외치면서 진짜 토끼처럼 깡총거렸다. 감탄한 얼굴로 입가에 크림을 잔뜩 묻히고 먹던 경순이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엄마는 아주 어릴 때 집을 나가서 할머니와 살고 있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그런 경순이를 부모님은 측은해했고, 예뻐했다. 어려운 환경에도 구김살 없는 그 아이가 참 대견하다고 칭찬을 했다. 파티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 경순이 손에는 엄마가 챙겨준 잡채, 불고기, 김밥, 케이크 세 조각이 담긴 삼단 도시락 통이 들려 있었다.
“울 할무니도 케익 못 먹어봤는데....”
경순이의 혼잣말에 부모님 억장이 무너지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 날, 우리 집 냉장고는 경순이가 가져온 고등어와 꽁치 때문에 반찬통 몇 개를 빼야만 했다. 그렇게 경순이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짓궂은 남자아이들이 왕따끼리 논다며 놀려댔고. 옷 잘 입고 예쁘장한 소윤혜 무리들이 속닥거리며 우리를 보고 키득거려도. 더 이상 두렵거나 외롭지 않았다. 레몬사탕이 든 유리병을 언젠가는 깨뜨리고 그 안에 레몬 사탕을 죄다 훔쳐 먹자는, 맹랑한 다짐을 하면서 국제빌딩부터 전자상가까지, 동네 구석구석을 누비고 돌아다녔다. 엄마가 차려놓은 밥상만 받아봤던 나는 경순이가 차려주는 음식이 참 신기하고 맛있었다. 김치볶음밥에 계란프라이를 얹어 내어 주는 경순이는 한참 언니 같았다. 한 번은 할머니가 소시지를 사줬다면서 한 봉지 다 털어 케첩을 찹찹 뿌려 깨를 솔솔 얹어서는 반찬으로 내왔다. 경순이는 무엇이든 양보하는 순하고 착한 아이였다. 나의 첫 친구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 훌륭했다. 반 아이들에 조롱과 담임에 학대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다가오는 여름방학을 경순이와 함께 할 생각에 가슴에 달 토끼의 방망이가 들은 것처럼 콩닥거렸다. 여름방학에 한강수영장을 가자고 약속했다, 수영복이 없다고 해서 내 껄 빌려준다고 했다. 깡마른 경순이한테는 좀 컸지만, 처음 입는 수영복에 신나서 폴짝 폴짝 뛰던 그 아이를 나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현조야! 방학 동안 할머니랑 남해를 내려가 있어야 해. 한 달만 일해주면 돈을 많이 준다고 했대. 꼭 편지할게!”
그러나 방학 내내 경순이의 편지는 오지 않았다. 조금 원망도 되었지만 할머니랑 돈을 많이 벌고 있나 보다 좋게 생각했다. 어린 나는 가난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방학 동안 경순이와 하고 싶던 많은 놀이들을 못한 게 아쉽지만. 어린 우리들에게 시간은 많았다. 한 달 만에 만날 나의 첫 친구, 경순이를 떠올리면 베실베실 웃음부터 나왔다. 고양이와 강아지가 표지에 그려진 노란 일기장에 [경순이와 현조의 교환일기] 라고 대문짝만 하게 쓰고 서랍 속에 소중하게 넣으며 개학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어느덧,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날 아침. 일찍이 학교로 가서 경순이 자리에 편지와 캐러멜을 올려두며 나의 하나뿐인 동무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종례시간이 되어도 경순이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나는 용기를 내어 무시무시한 담임에게 다가가 물었다.
“선생님....... 경순이가 오늘 안 왔는데요.”
교실바닥에 코를 박고 서 있는 나를 쏘아보던 담임이 안경을 콧등으로 걸치면서, 어려운 말을 무심하고 잔인하게 툭 던졌다.
“걔네 할머니 죽어서. 고아원 갔다던데?”
죽음이 무엇인지. 고아원은 또 무엇인지.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담임의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곧장 용문시장을 찾아가 할머니의 고무대야를 찾았다. 그러나 할머니와 경순이가 앉아 있던 자리에는 폐지만 가득 쌓여있었다. 그게 나의 첫 이별이었다.
“나야 나! 경순이! 이경순!”
나의 첫 친구이자 첫 이별. 지워버리고 싶은 그 시절의 산증인, 이경순을 다시 만난 건 생리를 멈추는 대포주사를 맞고 임산부석에 앉아 심술을 부리던 그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