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장편소설(유리병 레몬사탕)
건대 역 1번 출구로 나가는 계단 중간에서 걸음을 멈춘 채로 떨떠름하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나를 알고 있다는, 자신을 이경순이라고 밝히는 행색이 초라한 임산부가 나의 첫 친구라는 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겨운 유년 시절을 잠시 동안이나마 행복하게 해 줬고. 남은 일 년 반을 전보다 더 불행하게 만들었던 그 아이를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나. 그녀는 열두 살 그때처럼 낡고 해진 옷을 입고 여전히 해맑은 웃음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현조 맞는 거지?”
역사 계단을 사뿐사뿐 오르며 점점 가까워지는 이경순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뭇가지처럼 가느다란 손으로 아랫배를 감싼 채 다가오는 그녀를 그저 물끄러미 응시할 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윽고 코앞에서 걸음을 멈춘 이경순은 내 손부터 덥석 잡더니 마구 흔들기 시작한다.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처럼 너풀거리면서도 시선은 그녀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게 얼마만이니? 거의 30년 만인가? 너 하나도 안 변했다. 인상 쓸 때 미간에 호랑이 주름 생기는 것도. 입술 앙 다물 때 보조개 생기는 것도. 어릴 때랑 다 똑같아. 잘 지냈어? 부모님은 잘 계시고?”
정확히는 25년 만에 만난 경순이는 마치 어제 만났던 사이처럼 친근하게 대했다. 바짝 붙어 있는 그녀가 불편해서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고개만 끄덕였고 얼떨결에 잡혔던 손도 풀어냈다. 그녀는 잠시 주저하더니 곧 환한 미소를 머금고 멀어진 거리만큼 다가서며 물었다.
“나는 많이 변했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던 이경순은 별안간 낡은 천 가방을 뒤적이며 무언가를 열심히 찾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그녀를 위아래로 찬찬히 살펴보았다. 아무리 봐도 행색이 평범하지는 않다. 그냥 도망쳐버릴까? 잠시 고민했으나 생각처럼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자 봐! 나 경순이 맞지?”
이경순은 로또라도 당첨된 얼굴로 지퍼가 떨어져 너덜거리는 감색 지갑을 꺼내 펼쳐 들었다. 낡은 지갑 속엔 사진 한 장이 꽂혀 있었고, 그 안엔 열두 살 우리가 운동회 날 펄럭이는 만국기를 배경으로 활짝 웃고 있었다.
“너는 분명히 현조가 맞아.”
이경순은 단호한 얼굴로 내 기억을 깨우려는 듯 다시 물었다.
“나, 이경순! 정말 모르겠어?”
그래, 네가 경순인 건 나도 알겠어. 5학년 2학기 내내 너의 행방을 찾아 용산 바닥을 헤매었고, 6학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그리워했지. 커서도 가끔, 꿈속에 출연하던 너였어. 통통하던 볼 살은 사라지고, 움푹 꺼진 눈두덩이며 모래알처럼 까칠한 얼굴로 말라비틀어진 고목나무처럼 변했어도, 어떻게 내가 너를 몰라볼 수 있겠니.
“현조야. 정말 기억이 안 나는 거니?”
그렇지만 지금은 이경순이라는 어릴 때 친구를 가끔 꿈에서 보는 걸로도 충분하거든. 유년시절의 아련한 기억으로 박제되어 있는 것으로 만족하거든. 가끔 생각은 났지만, 보고 싶거나 안부를 주고받고 싶지는 않았어. 지나간 추억에게 내 시간을 할애하기에는 너무 어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야. 솔직히 이것저것 다 떠나서 여전히 가난하고 헌 옷을 입은 너를 피하고만 싶어. 나는 하고픈 말들을 머릿속으로 되뇌면서 계속해서 침묵을 지켰다.
“현조야 여름 방학에 편지 못써서 미안해. 갑작스레 할머니가 남해에서 돌아가시고 친척아주머니가 나를 섬에 버렸어. 할머니 지갑이랑 너랑 운동회 때 찍은 사진만 겨우 숨겼어. 네가 적어준 주소와 전화번호를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떠오르질 않았어. 사실 알았어도 만나지는 못했겠지만, 육지로 가는 배가 한 달에 한 번 들어올까 말까 한 섬이었어. 작부 집에서 열다섯 까지 허드렛일 돕다가, 사장아줌마가 이젠 다 컸으니 화장하고 손님 받으래서 도망쳤어. 원래 도망치기 힘든 섬이거든? 근데 나는 도망쳤어.”
이경순은 궁금하지 않은 자신의 묵직한 과거를 불편한 장소에서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았다. 심각한 내용처럼 들리는데 마트에서 산 물건이 불량품이어서 기분이 좀 상했다는 투로 아주 가볍게 말이다. 행인들이 지나갈 때마다 신경이 쓰여 구석으로 몸을 피했으나, 이경순은 모기처럼 따라붙었다. 여전히 머리는 떡이 져있고. 시큼털털한 악취가 은은하게 풍겨서, 저절로 구겨지는 인상을 펴내느라 혼이 났다. 이따금 까르르 웃으며 손으로 입을 막을 때마다 손톱의 까만 떼가 거슬려 딴청을 부려야만했다.
“임신했어?”
25년 만에 만난 그녀를 향한 나의 첫마디였다. 냉랭한 질문에 당황한 경순이는 크고 동그란 눈을 껌뻑이며 까만 눈동자를 이리저리 정신없이 굴렸다. 이내 망설이는 몸짓을 하더니, 발끝을 바닥에 톡톡 치면서 살짝 어깨를 흔들었다.
“응........ 어떻게 알았어? 초기라 티가 안 날건데.”
경순이의 두 볼이 발그레해졌다.
“임산부 키링 달았잖아.”
방금 전 임산부석에서 실랑이까지 벌여 놓고, 티가 나냐고 물어? 노숙하면서 지능도 떨어지게 된 건 아닌지, 의심에 눈초리로 그녀의 배를 응시했다. 곧 경순이가 되물었다.
“넌 임신한 거 아니지?”
“몸이 안 좋아서. 앉을 자리가 필요했어.”
“그랬구나. 미안해 자리 비켜달라고 해서, 사실은 네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 그랬어. 그런데 몸이 어디가 안 좋아? 어디 좀 앉을까?”
경순이는 볼품없는 몸으로 이리저리 오가며 앉을 자리를 찾았다. 마치 배만 조금 나온 나무젓가락이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우스워 보였는데, 웃음은 안 났다. 그냥 역사 계단 중간에서 뜬금없이 붙들린 상황이 짜증이 날 뿐이었다. 아침부터 병원 간다고 일찍 일어났고, 이런저런 검사를 받은 후라, 기운이 딸렸다. 집에 가서 뜨끈한 전기장판위에 눕고 싶을 뿐이다.
“그래, 경순아 반가웠어. 근데 이제 집에 가봐야 해서”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담담하게 인사를 건네고는, 등을 돌리는 순간, 경순이가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불러 세웠다.
“현조야, 잠시만 같이 있자. 평생을 널 그리워했어. 밤마다 기도했어. 죽기 전에 현조를 만나게 해 달라고.”
경순이의 고백에 얼떨떨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녀를 외면하지 않으면 굉장히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다는. 그러나 정강이까지 내려온 얇은 원피스 밑으로 드러난 앙상한 종아리가 내 동정심을 자극했다. 하아....... 이 한숨을 경순이 앞에서 대놓고 쉬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백번은 넘게 탄식하듯 뱉었던 것 같다.
“밥 먹었어? 내가 살게. 밥 먹자, 밥.”
밥을 산다는 이경순. 밥값은 있을까? 차비도 없어 보이는데. 나는 체념한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일단 위로 올라가자고 말했다.
‘하아....... 집에 가고 싶다.’
역사 계단을 오르면서 속으로 되풀이 하듯 말했다. 그러고는 마음을 좀 다스린 후에, 뒤 따라오는 그녀에게 너는 밥 먹었냐고, 물었다. 경순이는 아니! 라고 빠르게 대답했다. 사실 물어보나 마나 며칠은 굶고 다닌 꼬락서니다. 섬에서 도망친 후로 계속 떠돌아다니는 건가? 배꼽 밑에서부터 깊은 짜증이 솟구쳐 나왔지만, 애써 누르며 상념을 털어내듯 고개를 저었다. 역사 밖으로 나오자마자 대충 눈에 띄는 식당으로 몸을 돌렸다. 뭐 먹을 거냐는 한마디 없이, 제일식당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뒤따르던 이경순은 문이 닫히면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을 것처럼, 다급하게 그 틈을 비집고 따라 들어왔다.
“순댓국 좋아해?”
내 물음에 경순이는 메뉴판에 눈을 고정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어릴 적처럼 ‘케이크 처음 먹어봐요’ 2탄, ‘순댓국 처음 먹어봐요’ 같은 말은 안 하려나? 과거를 떠올리며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웃음이 들켰을까 봐 흠칫하며 경순이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여전히 메뉴판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침만 꼴깍꼴깍 삼키고 있었다. 그래 밥만 사 먹이고, 바이바이 해야지! 한적한 식당 한 구석으로 걸어가면서 순댓국 두 그릇을 주문했다.
[물은 셀프]
벽에 붙은 글씨를 보면서 물을 떠온 사이에, 경순이는 항아리에 든 깍두기를 우적우적 씹어 먹고 있었다. 벌건 국물이 옷에 뚝뚝 떨어지는데도 상관없이 사람 손만 한, 무김치 하나를 뚝딱하고 있었다. 물 컵을 경순이 앞에 내려놓으며 의자에 앉아 먼데를 바라보았다.
“한강에서 애기 아빠를 만나기로 했거든.”
묻지도 않았는데, 헤벌쭉 웃으며 경순이가 말했다. 앞니에 박혀있는 굵은 고춧가루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나도 모르게 손에 쥔 물 컵을 가슴 쪽으로 바짝 당겨 경순이로부터 되도록이면 멀찌감치 떨어졌다.
“뚝섬에서 만나기로 한 거야? 그러려면 지하철 다시 타야 할 텐데. 밥 먹고 나서 길 알려줄게.”
아직 밥도 먹기 전인데, 벌써 이별할 시간을 셈하며 경순에게 서울 지리를 상기시켰다. 그러자 경순이는 짙은 쌍꺼풀이 사라질 만큼 크게 눈을 뜨며, ‘뚝섬? 그게 뭔데?’ 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마시던 물 컵을 내려놓으면서 살짝 짜증이 난 어투로 말했다.
“한강이 한 군데가 아닌데. 어느 역에서 보기로 한 거야?”
“한강이 그냥 한강이 아니었어? 신랑이 한강에서 보자고 했는데.”
뭐라고? 등짝에 소름이 돋아 옷을 뚫고 나올 만큼, 믿을 수도, 예상치도 못한 답변이었다. 나는 놀란 마음을 애써 다독이며,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어디서 오는 길이야?”
“그냥 여기저기. 섬에서 나오고는 진주에 있었고. 그 다음에는 부산에 쭈욱, 있었어. 일하는 식당으로 애기 아빠가 자주 왔어. 너 밀면 좋아해? 부산하면 밀면 이거든? 나 밀면 잘 만들어, 아 그렇다고 내가 주방장은 아니었어. 주방 드나들고, 매일 들어오는 식재료도 보니까 대충 비슷하게 만들더라고 그래서 사장님이 엄청 눈치주고 그랬다니까?”
이경순은 역시나 묻지 않은 말들을 주절주절 늘어놓으며 경박하게 웃어재꼈다.
“근데 말이야, 밀 면은 반죽이 중요해. 내가 일했던 식당은 옥수수전분을 넣더라고.”
남편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밀 면이라니… 왠지 엄마가 떠올랐다. 허 여사도 아침 드라마 이야기를 하다가도 갑자기 동네 아줌마 욕으로 주제를 바꾸고, 이어서 열무김치가 오래되어 시어졌으니 저녁에는 비빔밥을 해 김치 통을 비워야겠다는 말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이경순도 허여사와 마찬가지로 삼천포로 헤엄을 치다 못해 빠져 죽을 수다를 떨었다. 속으로 빨리 식사나 나왔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 뚝배기에 버글버글 끓는 순댓국이 나왔고, 이경순은 그 뜨거운 걸 식히지도 않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며칠 굶었니? 묻고 싶었지만 돌아올 대답이 길고 장황할 것 같아 참았다. 힘없이 순댓국에서 순대를 골라내 앞 접시에 식히고 있는데,
“현조야 나 이름 바꿨어! 이경순 아니고, 이은조야.”
“개명했어?”
뜨거운 수저를 입에 물고 얼굴을 잔뜩 찌푸린 경순이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그릇에 머리를 박았다.
“심은하 언니의 은! 현조의 조! 그래서 은조! 내가 좋아하는 여자 둘 이름 따서, 은조. 우리 심은하 언니 닮고 싶어서, 잡지에서 사진 오려서 갖고 다녔잖아.”
실로 오랜만에 듣는 이름 심은하. 90년대를 주름 잡았던 여 배우다. 은하 언니가 아름답고도 무섭게 나왔던 추억의 납량특집 드라마 ‘M’ 마지막 화에서 은하언니가 죽을 때는 경순이와 얼싸안고 통곡을 했었다.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보던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웃음소리가 너무 컸다는 걸 깨닫기도 전에, 그녀는 달고나를 만들어먹다가 국자를 다 태워먹었던 일화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비장의 무기! 수학문제 못 푼다고 나를 때리고 옷을 벗긴 담임선생을 혼내준답시고, 담임 차 옆에 오줌을 눈 경순이의 엉뚱한 복수와, 운동회 때 박을 터뜨려야 할 콩 주머니로 소윤혜 뒤통수를 갈겼던 일화까지, 시시콜콜한 모든 것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경순이가 입을 벌릴 때마다 나의 두텁고 견고한 성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직도 소시지 문어모양으로 자른 거 좋아해?”
“응!”
“계란 입힌 분홍소시지도?”
“없어 못 먹지!”
“뜨끈한 밥에 마가린 넣고 간장 비벼 먹는 것도?”
나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이경순 마수에 서서히 걸려들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경순이의 계략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연달아 그녀가 날리는 추억공격에 가랑비 옷깃 젖듯 촉촉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간 나를 괴롭힌 자궁과 생리통, 수술에 대한 두려움과 근심이 쌀 한 톨만큼 생각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현조 어디 아파?”
어디 아파? 아파? 아파? 결국 내 방어벽은 그 한마디에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경순이를 푼수 같은 수다쟁이 라며 속으로 비웃었는데. 나는 경순이보다 더 길게 아주 많이 그간에 고통에 대해 늘어놓았다. 경순이는 먹던 수저를 내려놓고 내 말이, 주책없는 눈물이 잦아들 때까지 경청하며 잠자코 있어줬다. 혹여 방해가 될까 싶어 숨마저 아주 고요하게 내쉬면서 말이다.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며 눈시울도 붉혀주었다.
“생리 때마다 현조 아파했던 거 기억나.”
나의 첫 친구 경순이는 여전히 착하고 순했다. 그런 그녀를 도저히 길바닥에 버려둘 수 없었다.
“그 어린 게 얼마나 힘들었을까.”
어른에 차가운 심장과 사무적인 말투를 아무리 흉내 내봐도 나는 여전히 길을 잃고 우는 여섯 살이고, 단짝이 필요한 외로운 열두 살이었다. 병든 자궁을 아무렇지 않게 떼어버리는 것도, 얇은 헌 옷을 입고 거리를 떠도는 경순이를 외면하는 것도, 나에게는 너무 어렵고 슬프고 사무치게 아픈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지친 자궁에게 생리를 멈추어 잠시 휴식을 주었고, 길 고양이처럼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그 애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
“그때 그 아이가 옥탑아가씨라고? 어머어머어머어머!”
허여사가 손에 든 마늘을 플라스틱 대야에 집어지면서 아침드라마 볼 때나 낼 법한 탄성을 내질렀다.
“신랑은? 신랑은 어디 있어?”
“모르겠데.”
“아이고! 당했네. 당한거야!”
“뭘 당해?”
“척보면 몰라? 임신한 여자 놔두고 사라진 거면 말 다했지! 아마 그 남자 유부남일거야. 경순이가 양아치한테 속았네! 속았어!”
엄마는 막장 드라마로 다져진 추리 실력으로 경순이에 대한 얘기를 마치 사실인 양 늘어놓았다. 엄마가 남 얘기를 어떻게 퍼뜨리는지 잠깐 소개하자면,
“어머, 현조야, 김혜정이가 죽었단다. 그렇게 착하게 살았는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김혜정이 죽었다고? 그런 뉴스 없었는데?”
“아! 왜! 황금마차에 영진이 엄마!”
“아 쫌! 드라마 배역이라는 말을 앞에 붙이면 안 돼? 이래서 헛소문이 나는구나?”
“어머, 어머, 현조야! 그 배우 있잖아, 차도현! 글쎄 그이가 바람을 피웠단다. 도박도 했다는데?”
“차도현은 결혼도 안했어! 차도현 아니고 차진영이야! 제발 다른 데 가서 그러지 마! 엄마 같은 사람 때문에 헛소문이 생기는 거라고!”
허여사의 정보력은 컴퓨터로 치면 보급형인데, 입은 하이엔드다. 허여사의 남 얘기는 사람을 환장하게 만드는 기술과 곧이 곧 데로 들으면 안 되는 함정이 숨어있다.
“내 말이 틀려? 신랑이라는 사람도 신랑이 아닌 거잖아? 하룻밤 불장난으로 아이가 생긴 거고! 친부 되는 사람이랑 연락도 안 되는 거고!”
흥분해서 떠들던 허 여사, 벌떡 일어나더니 마늘향이 벤 손가락 끝을 코에 대며 킁킁거린다. 그러고는 빈손을 탁탁 털고 가방을 뒤져 지갑을 꺼내 들면서 시퍼런 지폐를 수북하게 꺼내 카운터에 툭 던지는 것이 아닌가?
“너 가서 경순이 먹이게 소고기 좀 끊어와!”
“지금 양파 까는데?”
“잔말 말고! 사오라면 사와! 얼마나 배가 고플 거야. 신랑도 신랑이 아니고, 할머니도 없고. 하늘도 무심하시지, 불쌍해라. 쯧쯧쯧”
허 여사 전매특허, 내가 너를 그렇게 키웠어? 이어지는 혀 차는 기술 들어가시겠다. 붉어지는 눈시울을 손가락으로 쓰윽 닦으며, 어휴,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기 시작한다.
“경순이 보고 막 아는 체 하고 그르지말어.”
“네 년이나 그르지 말어!”
허 여사, 아버지를 연신 부르다가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다. 그러더니 돌연 털 잠바를 챙겨 입고는, 가방을 둘러메며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한다.
“향초 피워놨으니까. 한 시간 있다가 꺼. 아직 건어물 냄새가 배었어.”
“몇 십 년을 통북어에 미역 다시마 또 뭐냐 말린 가자미에 오징어로 가득했는데, 하루아침에 냄새가 빠지겠어?”
“그러니까. 향초 좀 켜두라고!”
별안간 짜증이다.
“가려고?”
“가야지.”
“자고 간다며.”
“나 있으면 경순이 불편하지. 엄마 가고 나면, 너는 안방으로 옮기고, 네 방은 경순이 방으로 내줘. 안방 쓰라고 하면 부담스러워서 옥탑에서 못 내려오지.”
허 여사 다시 아버지를 찾으며 출입문을 열고 나간다. 짤랑, 종소리가 울리는 걸 들으며 뒤따라 나섰다. 성당 앞에 세워둔 차로 걸어가던 엄마는, 경순에게 소고기 미역국을 끓여주라고 했다. 좋은 미역을 옥탑 작은 방에 뒀으니 꼭 그걸로 끓여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차에 올라 운전용 장갑을 끼고, 잠시 기도를 드린 뒤 출발하는 엄마를 멀뚱히 바라보다가 책방으로 돌아온 나는, 손질된 마늘과 양파를 소쿠리에 옮겨 담았다. 손가락 마디마디 쑤시고 욱신거렸다. 열어놓은 현관문 사이로 들어온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내려왔다. 부르르 몸을 떨었고 급격히 체온은 떨어져서 콧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직 마늘 반접과 양파 한 망이 남았다. 이럴 때 구조대원처럼 등장하는 이경순. 지금쯤 나타나야 하는데? 책장 위에 자명종시계를 확인한다.
“아니 왜 안와?”
그때, 짤랑~ 구원의 종소리가 울리더니 경순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조야! 저녁 먹자. 어머님 어디 가셨어?”
반가운 음성에 벌떡 일어나 등을 뒤로 재끼면서 으윽, 앓는 소리를 내었다.
“마무리는 내가 할게!”
“엄청 많이 남았는데?”
“밖에 있는 거랑, 이게 다 아니야?”
“엄청 많잖아! 지금 이것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걸렸어!”
“어머님이 못하게 해서 손 떼고 있었는데, 나 일 엄청 잘해!”
경순이는 자신 있다는 듯 소매를 걷어붙이면서 과도 칼을 들었다.
“그리고 현조야. 나 은조라고 불러주면 안되겠니?”
“서류상 개명한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다방에서 은조라고 불렀는데.”
“우리 허여사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왜들 그르니? 이름을 바꿀 거면 확실히 개명 신청을 하던지.”
경순이는 도톰한 입술을 내밀면서 순식간에 양파 껍질을 벗겨냈다.
“우와 너 엄청 잘한다!”
욱씬거리는 허리에 손을 짚고 경순이의 정확하고 빠른 손놀림을 감탄하며 쳐다보았다. 경순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마늘 밑동을 똑 떼어내고는 아이스크림 봉지를 벗기듯 거침없이 마늘 껍질을 벗겨냈다. 금세 흠 하나 없는 작품이 완성됐다.
“야, 너 마늘 깎는 기계 같다!”
“빨리 올라가서 밥 먹고 쉬어! 신 김치 송송 썰어서 참치 넣고 김치찌개 끓여놨어.”
“너 또 주워온 밥공기에 계란 얹은 고봉밥 퍼놨어?”
“당연하지! 김치찌개는 고기보단 참치고, 고봉밥 위에는 반숙 계란 프라이를 얹어야지!”
얼마 전, 한강 멘션 일층에 있는 식당이 폐업을 했는데 필요한 사람들 쓰라고 문 앞에 내놓은 그릇을 경순이가 주워왔다. 그녀는 특히 뚜껑에 꽃무늬가 새겨진 스테인리스 밥공기를 애정하는데, 할머니를 떠올리게 만든다는 이유에서다. 그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굳이 미리 밥을 퍼서 계란 프라이를 얹어 뚜껑을 닫아놓는 건 공감할 수가 없다. 밥공기에 꽉 찬 뜨거운 압력 때문에 뚜껑이 열리지 않아 밥상 앞에서 씨름을 하는 나를 보며 깔깔거리는 이경순을 보고 있노라면, 당장 거리로 내쫓고 싶은 충동이 올라온다.
“알아서 퍼먹는다니까?”
“밥은 반드시 누군가 퍼줘야 하는 거야!”
이경순은 참 이상한 철학을 고집한다. 어릴 때 남의집살이를 할 때도, 밥상 다 차려놓고 주인아줌마 밥까지 다 퍼놓고는 자기 밥을 퍼달라고 생떼를 부려서 주걱으로 맞은 적도 있단다. 그럼에도 내일이 되면 다시 밥을 퍼 달랐단다.
“근데 왜 나한테는 밥 퍼달라고 안 해?”
라고 물으면,
“너랑 우리 할머니는 예외야!”
라고 답한다.
“아무리 봐도 이상해. 어릴 때는 이상하지는 않았는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가자미눈으로 경순이를 흘겨보았다.
“올라가서 밥 먹으라니까? 찌게 다 졸아들겠어!”
“그럼 밥만 먹고 내려올게!”
“그냥 누워 있으셔! 내가 문 닫고 올라갈 테니까!”
제법 살이 올라 예전의 예쁘장한 얼굴이 다시 보이는 경순이가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애 아빠는, 다시 만날 방법은 없어?”
뜬금없는 내 질문에 경순이가 멈칫하며, 동작을 멈췄다.
“언젠가는 만나겠지.”
“정말 넌 어릴 때부터 심각하게 긍정적이야! 고쳐!”
향초에 불을 끄면서 핀잔을 날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꿈을 꾸는 눈으로 순식간에 그물망에 든 양파를 반이나 해치운 경순이는 유리병에 반사된 햇살처럼 반짝거리며 웃었다. 쓸데없이 밝고, 넘치게 일을 잘하는 이경순. 온몸에 노동이 배어 있는 그녀는 열두 살 이후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분명 동네 똥개처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살아왔을 것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추측의 여왕 허 여사를 닮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오소소 팔등에 돋아난 닭살을 쓸어내리며, 야무지게 양파 껍질을 벗겨내는 경순이를 돌아보며 외쳤다.
“영원히 네 이름은 이경순이야! 이 경 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