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장편소설(유리병 레몬사탕)
“3월에 웬 함박눈?”
“겨울이 가기 싫은가 봐.”
한 손에는 김이 나는 고구마를 또 다른 손에는 윤동주 시집을 펼쳐 든 경순이가 차창 밖을 내다보면서 제법 시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조만간 시인되겠어?”
내 빈정거림에도 아랑곳없이 시집에 입이라도 맞출 기세로 얼굴을 들이밀던 경순이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윤동주 시 중에 제일 잘 나가는 건 뭐야?”
“잘 나가기는, 무슨 집나간 며느리야?”
나는 요즘은 경순이가 하는 작은 말 한마디에도 못마땅해 핏대를 세우곤 한다.
“대표작이라고 하지?”
“아하하하, 윤동주 선생님 대표 시는 뭐야?”
“서시도 있고, 별 헤는 밤, 자화상, 많지 뭐...”
“현조는 어떤 시를 가장 좋아해?”
참, 궁금한 것도 많은 이경순이다. 묵묵부답으로 경순을 무시 한 체, 동그라미 표시된 달력을 응시했다.
“응? 현조는 어떤 시를 좋아해? 응? 응?”
예정된 진료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대포주사를 맞은 뒤 폐경 증상으로 너무 힘들었다고 말하면 교수님은 분명 주사 치료를 중단하자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결론인데, 솔직히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혹시 모를 기적이 일어나, 자궁 속 혹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기적의 노처녀, 대포주사로 자궁과 난소의 혹 소멸!]
이런 제목으로 의학 잡지에 실릴 가능성도, 아주 없지는 않지 않은가.
“현조는 작가잖아. 어떤 시를 좋아하는 지, 궁금해.”
“나 작가 아닌데?”
“현조는 글 쓰는 대학 들어갔고, 책도 많이 보고, 글도 쓰는 거 봤는데?”
“글 쓰는 대학은 중퇴했고요. 책 많이 본다고 작가 아니고요. 글은 안 쓰거든요? 자순이한테 편지 쓰는 거거든요?”
“우와! 자순이한테 쓰는 편지 모아서 책으로 내자!”
보이는가? 내 이마의 시퍼런 심줄이 숭어처럼 튀어 오르는 것을.
“너 저녁장사 안 해?”
이러면, 대충 말 걸지 말라는 신호로 알아듣고 입을 좀 다물겠지?
“나는 말이야, 길이 참 좋아.”
저 저 저 눈치는 밥 말아먹은 계집애. 하아, 혼자 있고 싶다. 격렬히 혼자 있고 싶다. 나의 책방 안에서 좋아하는 노래 들으면서 혼자 있고 싶다. 아무 말도 안하고, 아무 말도 안 듣고 그저 혼자 있고 싶다.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르릅니다. 나도 말이야, 한없이 먼 길을 걷다가 슬리퍼가 끓어지도록 걷고 또 걷다가, 하늘을 올려다 본적이 있어. 하늘에 별이 가득해서 어둔 밤에 가로등 하나 없었지만 온통 환했어.”
경순아. 진짜 안 궁금하다. 나 진심으로 혼자 있고 싶어. 제발 그만 좀 말해. 고구마의 껍질을 벗기며 짧은 한숨을 폭 내쉬자, 경순이가 빤히 쳐다본다.
“병원 가는 거 때문에 마음이 안 좋지? 현조야 괜찮아. 좋아졌을 거야. 혹도 사라지고, 수술 안 해도 된다는 말 들을 거야.”
경순의 위로는 한없이 가볍고 진정성이 없다.
“쉽게 말하지 마!”
만만한 콩떡 같은 이경순에게 한방 쏘아붙이고는 금세 미안해져서 딴청 부리듯 창밖을 내다보았다. 곧 봄이 온다는데... 어제는 향기로운 흙내음도 풍겼었는데... 별안간 눈이 내린다. 그것도 펑펑 쏟아지는 굵고 진한 함박눈이. 직장 다닐 때는 느껴보지 못할, 화요일 오후 4시에 평안함. 옆에 이경순만 없으면, 완벽한 평온을 누릴 수 있을 텐데.
“날이 풀리면 손님들이 차가운 밀 면만 찾을 거야, 그 전에 냉동실 하나 더 들여야 해. 경동시장 갈 건데, 같이 갈래? 여름 오기 전에 사야지, 에어컨도 들여야 하는데.”
호기롭게 개조한 나의 창고 상가는, 깡패 같은 문 사장을 거치며 공실 상가로 전락할 뻔했으나, 이경순의 밀면 가게 덕분에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에서 유명한 명소가 되었다. 악덕 건물주 같았으면 세입자를 내쫓고 가게를 차지하거나, 월세를 크게 올렸겠지만 나는 꽤 양심적인 건물주다. 월세를 줄 때, 생활비도 함께 내는 경순에게 생활비는 받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상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착한 건물주상, 이런 거 없나?
“국수 그릇이랑 식기도 더 사야 해. 주말에 같이 갈래? 맛있는 것도 사먹고.”
이경순은 점심 장사를 3시까지 하고, 5시부터 저녁 장사를 한다. 그 중간에는 재료를 준비하고, 휴식 시간을 갖는다. 브레이크 타임에는 꼭 책방으로 건너와 얇은 시집 한권을 붙들고, 쉴 새 없이 조잘거린다.
“응? 현조야, 가자. 바람도 쐬고. 맛있는 거 사줄게. 뭐 먹고 싶어? 요즘 매일 밀 면만 먹었잖아. 고기 먹을까?”
“참! 고기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다음 날 쓸 육수를 전날부터 끓여 놓는 밀면 가게 때문에, 책방까지 육수 냄새가 진동한다. 간신히 건어물 냄새 잡아놨더니, 이번엔 고기 육수 냄새가 책방을 침범하는 것이다.
“탈취제를 뿌리면 뭐하냐? 옆에서 육수냄새가 만날 진동을 하는데.”
“미안. 환풍기 설치했는데도, 육수 향이 진해서 그래. 끄고 올게.”
“됐어!”
그러다 맛 변했다고, 손님 끊어지면 어쩌려고.... 그래도 네 덕에 풍요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는데, 라는 말은 마음의 소리로 남겨두겠다.
“그럼, 현조야. 주말에 아주 좋은 탈취제랑 방향제 사줄게. 나가자. 응?”
끈질긴 이경순. 어쩐지, 밟을수록 더 질기게 자라는 잡초 같다. 그 옆에 있으면 내가 온실 속 화초가 된 기분이다. 화초는 싫은데.
“현조야, 저번에는 숙취 때문에 힘들다고 새벽에 단골 손님들이 와서, 육수만 달라는 거 있지? 그래서 말이야. 어차피 새벽에 문 여니까, 육수에 밥 말아서 팔아볼까 봐.”
이제는 국밥까지? 그러다 십 첩 반상 차려 팔지?
“사거리에 국밥집만 세 개야. 적당히 해라. 백년 천년 여기서 죽치려고? 신랑 오면 네 집으로 돌아가는 거 아니었어?”
“그런가........”
이경순과 불편한 동거가 이어지면서, 나는 박현조에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1. 질투가 많다.
2. 속이 좁다.
3. 말을 참 못되게 한다.
나라는 인간이 이토록 후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건 참 힘든 일이다. 이경순에 대한 감정은 대포주사 부작용과 같다. 좋다가, 싫어지고. 측은하다가, 얄밉고. 의지가 되다가, 질투가 난다. 폐경증상 때문에 가뜩이나 힘든데, 이런 감정노동까지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풀이 죽은 체, 시집 끄트머리를 살짝 접는 이경순이 어깨를 웅크린다. 잡초가 시들면, 물을 주고 싶어진다.
“그럼 주말에 가던가.”
내 말이 끝나자마자, 좋다고 무거운 몸으로 폴짝 뛰는 이경순이다. 저러면 또 얄미워진다니까. 남대문 시장에 가서 옷 구경을 하자는 이경순을 찬찬히 뜯어보는데, 여리여리, 코스모스 같은 것이 눈길이 가긴 한다. 순간, 불룩하게 나온 경순이 배가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나 나나 배는 비슷하게 나온 것 같은데, 네 배에는 생명이 들었고. 내 배에는 지방과 혹만 들었구나. 아무래도 자순이 이것이, 이경순의 건강한 자궁을 질투하는 것 같다. 왜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생리하는 여자 옆에 있으면 자궁이 질투해서 다음날 생리를 해버린다는. 그래서 나는 내 자궁에 '자돌이'가 아니라 '자순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성차별 의도는 아니다. 왠지 남성보다는 여성이 질투가 더 많을 것 같아서 그랬다. 물론 이 말을 들은 전 세계의 성 평등을 외치는 여자들이 피켓을 들고 항의할지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경순이가 나 보다 인물이 좀 나아서도. 장사실력이 좋아서도. 인간관계가 좋아서도. 그런 유치한 이유로 미묘한 감정을 품게 된 것은 아니란 말이지? 그렇다 범인은 바로 자순이 고년이다.
“현조야, 화목난로는 아버님이 설치하셨어?”
이경순은 내가 아무리 못되게 굴어도 싫은 내색 한 번 없다. 밀면 가게로 돈을 벌기 전에는 그냥 얹혀살았으니 그렇다 쳐도, 지금은 어엿한 사장 아닌가? 그것도 인스타에 자주 등장하는 ‘핫한’ 밀면 가게 사장님. 게다가 경순이가 식당을 그만두겠다고 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보는 건 아마 나일 것이다. 문 사장 사건 때도, 경순이가 아니었으면 스트레스와 공포에 질려 심장이 터져 죽었을지도 모른다.
“화목난로에 둘러앉아서 라면도 끓여먹고, 고구마도 구워먹고. 겨울에는 보리차 끓여 먹고. 근데 사실 화목난로를 만든 건, 예전 건어물 장사 했을 때 입구가 뻥 뚫려 있었거든.”
못되게 군 게 내심 미안해서, 장황한 수다로 죄책감을 덮는다. 앞마당에 모닥불을 피우는 대신, 화목난로에 고구마를 굽으며 말이다.
“한 겨울에는 엄청 춥잖아. 여름에는 덥고. 어머니 아버님 엄청 고생하셨네.”
“춥고 덥고 그런 건, 아무 상관 안했지. 남의 일 하다가, 내 건물에서 내 장사하는데. 그때 부모님은 한 걸음 걷고, 감사합니다. 두 걸음 걷고, 감사합니다. 그러고 다녔어.”
“푸하하하하, 진짜 현조 부모님은 최고야!”
“추운 겨울에 화목난로는 낭만 있었지, 가게 안쪽에 들마루 만들어서, 전기장판 깔아놨거든, 이불 덮고 엄마 아빠 장사하는 거 구경하고 그랬어. 너무 추워지면 입구에 비닐 쳤어. 비닐 보온력 무시 못해, 엄청 따뜻해.”
“그래? 그럼 우리도 비닐 칠까?”
“지금은 문을 달았잖니? 안 보이니?”
부모님이 건물주가 되기 전에는 나는 늘 집에 혼자 있었다. 부모님은 새벽에 나갔다가 새벽에 들어왔다. 헌데 건어물 장사를 시작한 뒤로는 늘 그 자리에 계셨다. 외출하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면, 건어물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등대처럼 반짝였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나를 기다리는 부모님이 계셨다.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크고 작은 파도에 떠밀려 곤죽이 되어 돌아와도 내가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던 건 등대처럼 그 자리에서 나를 맞아주는 부모님이 건어물 가게에 계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모님이 상주로 내려가신 댔을 때, 독립을 하게 되는 것 같아 신선하고 헌책방을 열게 될 생각에 기쁘면서도 뭔가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헌책방에 유독 애정을 붓는 것 같더라니, 이 자리가 현조에게는 위로였구나?”
경순이의 말에 ‘어 그랬었나봐. 헌책방을 차린다면 꼭 이 자리에서 하고 싶었어.’ 라고 속으로 답했다.
“부러워.”
경순이의 부럽다는 말에 괜스레 죄책감이 밀려든다. 자랑하려던 건 아닌데, 경순이 앞에서는 내 작은 일상의 추억도 괜히 자랑이 돼버리는 것 같다. 그녀와 살면서 불편해지는 게 바로 이런 것들이다. 자꾸 나쁜 사람이 돼버리는 거. 분위기가 착 가라앉는다.
“나는 신경림 시인에, 가난한 사랑 노래, 좋아해.”
주눅이 든 경순이 얼굴에 화색이 돋는다.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시인이 가난했던 노동자 부부의 결혼식 축사로 읊은 시였데, 가난은 사람을 아프게 하지만, 깊게도 만드나봐. 시를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어.”
“와 역시 현조는 다르다. 시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도 하는 구나.”
“너도 길을 읽으면서 생각 했잖아.”
“그런가... 나 그 시 읽어 보고 싶어.”
“찾아 줄게.”
시집만 모아 놓은 책장으로 가, 찾아 주려는데 경순이가 고구마를 한입 베어 물고는 오물오물 부지런히 턱 근육을 움직이다가 꿀떡 넘긴다. 급하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보다. 아무래도 내 기분이 좋을 때, 하고픈 말들을 하려는 모양이다. 좀 짠하다.
“여기는 해가 참 잘 들어.”
“건어물 장사 할 때는 그게 말썽이었는데.”
“왜?”
“건어물 해 받으면 누렇게 변하거든.”
“아....... 까다롭다. 물고기들. 참 현조야 내가 다방에서도 일했다고 말했나?”
“한 일억 번 쯤?”
스무 살, 박현조가 노량진에서 재수입시를 준비할 때 스무 살, 이경순은 다방에서 일했다고 한다.
“여름에는 냉 오미자차가 최고 인기였는데, 6월정도 되면 후식으로 오미자차 줘야겠다.”
어지간히 장사가 재밌는가보다. 틈만 나면, 밀면 가게 얘기다.
“장사 재밌어?”
경순이가 객쩍게 씨 익, 웃는다.
“진즉에 다방 같은데서 일 하지 말고 장사를 하지 그랬어. 뭘 해도 잘했을 것 같은데”
“다방 같은데, 아니야.”
“뭐?”
어떤 것에도 반박하지 않던 이경순이 갑자기 내 말을 꼬집었다. 당황해서 시집을 찾다 말고, 경순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다방에서 일하지 않았으면, 내 사랑을 만나지 못 했을 거야. 앞으로도 또 사랑을 할 예정이지만, 다음세상에서 다시 만나 사랑할 사람은 다방에서 만난 그 사람이거든.”
하아..... 투 머치, 누가 물어봤다고. 이러니 저 아이에겐 틈을 주면 안 된다. 얘기를 하는 것도, 듣는 것도 상당한 에너지가 소모된다. 이경순과 살면서 모든 기운이 바닥이 났다. 내 기를 쪽쪽 빨라먹는 흡혈귀 같은 이경순.
“그렇지만 현조 말이 틀린 건 아니야. 다방 같은데 맞아. 나도 그러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냥 먹고 살다보니까. 그렇게 되었어.”
또 주눅 모드에 들어가는 이경순이다. 불쌍한 얼굴로 고구마를 한 입 베어 무는 이경순을 짠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좀 까칠하지? 아무래도 대포주사 부작용 때문인 것 같아, 그 주사가 생리를 멈추게 하면서 갱년기 증상을 나오게 하거든. 그러니까 내가 좀 밉게 말해도 이해해.”
경순이 눈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죄책감도 싫지만, 신파는 더 싫다. 그러지 마! 이건 아니야. 눈물이라도 닦아줘야 하나, 고민하는데. 경순이가 소맷귀로 눈물을 쓰윽 훔치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더 미안해. 뭐라도 해서 도움이 되고 싶었어. 예전에 말했지? 열두 살에 섬에 팔려가서 작부 집에서 주방장 했었다고. 작부 아줌마가 자기보다 내가 요리를 더 잘한다고, 가끔 칭찬해주곤 했어. 그 다음엔 다방이었는데, 거기선 음식 잘하는 건 소용이 없더라고. 그래서 커피를 기가 막히게 타게 됐지, 뭐야?”
경순아... 경순아.... 이경순아! 또 삼천포로 가는 거니? 신경림 시집을 찾다말고, 일인용 소파위로 펄썩 주저앉았다. 기가 빠져서, 어지럽다.
“그래서 말이야, 다방 언니가 경순이가 뭐냐고, 새련이 어떠냐는 거야? 그래서 내가 은조라고 하겠다고 했지. 내가 왜 은조로 이름 지었는지, 말했지?”
“어...... 일억이천번 쯤?”
가만 보면, 엄마랑 이경순은 좀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마구잡이로 떠들어대는 경순을 보면서, 왜 저 아이를 내치지 않고 옆에 데리고 있는지 알 것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상주로 내려가니, 허 여사 도플갱어가 나타났다.
“목련다방 에이스가 나였어. 인기가 제일 많아서 배달도 제일 많이 다녔다? 아 맞다. 나 오토바이 잘 타는데! 오토바이 살까? 현조 뒤에 태우고 바다 갈까?”
“그래... 네 똥 굵다.”
이경순이 푼수같이 웃으며 뒤로 몸을 꺾자, 볼록 나온 배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야야, 배! 배 조심해.”
저 아이는 아프고 어쩌면 부끄러울 수도 있는 과거를 어쩜 저렇게 툭툭 내뱉을까? 자존감이 엄청나 저래 용기가 있는 건지, 아니면 좀 모자라 그런 건지. 그도 아니면, 그렇게 해서라도 슬픔을 털어내려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어쨌든 딱하고 안 된 그녀에게 나도 참 괴팍하기 이를 데 없다. 부모님과 떨어져 살다 보니, 괜히 경순이가 만만한 대상이 돼버린 것이다. 못내 미안한 마음에 넌지시 말을 걸어본다.
“자리 없어서 그냥 돌아가는 손님들, 책방으로 보내. 옥탑에 접이식 테이블이랑 의자 많으니까, 점심이랑 저녁엔 책방에 깔아둘게.”
“정말? 현조야! 정말이야?”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난 이경순. 커다란 눈에 물이 고이려든다.
“야! 울지 마! 딱 싫어!”
“안 울어! 절대 안 울게!”
“내가 저녁에 일층으로 옮겨 놓을 테니까, 무거운 몸으로 돕는다고 설치지나 말어.”
“근데, 왜 접이식 테이블이 많은 거야?”
“건어물이 여름에는 잘 안 나가거든, 그래서 허 여사가 날 더워지면 맥주랑 마른안주를 가게 앞에서 팔았어. 그때 사다 놓은 것들이야.”
“아 그렇구나, 역시 어머님은 머리가 좋으셔. 내 롤 모델이셔. 고마워 현조야. 나 진짜 잘 해볼게.”
“됐고. 신랑 만나서 집으로 돌아갈 땐, 권리금 같은 건 못 준다. 그리고 다음 세입자 구해놓고 나가.”
또 또 못되게 말해버렸다. 이게 아닌데, 데굴데굴 굴러가는 멍청한 눈알로 경순이를 살폈다. 흠.... 아무런 타격도 없는 눈치다.
“내가 막말하면 기분 나쁘지?”
“현조가 막말을 언제 했어?”
“막말을 모르는 거야?”
“현조야말로 정말 막말을 모르는구나?”
옅은 미소를 지으며 책을 덮는 이경순이 가소롭다는 표정을 짓는다. ‘박현조 한참 어리구먼, 이 온실 속 화초 같으니라고.’ 뭔가 이런 오만한 기색이 보여 묘하게 기분이 상하려든다. 입술을 뾰족이 내밀고 거북한 표정을 짓자, 우월감을 드러내려던 경순이가 금세 깨갱하며 꼬리를 내린다. 그녀와의 동거가 길어지면서 이런 묘한 기 싸움이 종종 벌어진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던 그때, 짤랑 종소리와 함께 책방 문이 열렸다. ‘손님이다!’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어서 오세요!”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수줍은 얼굴 하나가 배꼼 고개를 내밀었다. 하얀 눈이 소복하게 내린 파마머리에 일흔은 족히 되어 보이는 노년의 여성이 양손 가득 보따리를 들고 서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았다면, 그 맑은 표정 때문에 앳된 소녀로 착각할 뻔했다.
“실례합니다. 혹시 책도 받으시나요?”
“그럼요!”
들고 있던 고구마를 냉큼 경순이 손에 쥐어주고, 문 앞에서 주춤거리던 노인에게 껑충 다가섰다.
‘이경순, 잘 보거라! 마음의 양식을 파는 교양 있는 박사장이올시다!’
나는 책을 팔 때보다 책이 들어올 때가 더 좋다. 오늘은 또 어떤 보물이 나를 기쁘게 해줄까? 두근두근,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노인이 내려놓은 보자기를 풀기 위해 쪼그려 앉았다. 오! 보자기까지 황금색이다.
“동화책이 이렇게나 많아요? 거의 새건 대요?”
“폐지로 내놓으려다가 아까워서요, 손자 같은 아이들한테 갔으면 싶어서요.”
“다 신간이네요. 신간은 꽤 쳐드리거든요.”
“아니요. 돈은 안 주셔도 돼요. 정말이에요.”
어르신은 손을 내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은테안경 너머, 우물처럼 맑고 깊은 눈동자가 잠시 일렁이더니. 별안간, 투명한 물 한 줄기가 늙은 뺨 위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깍지 낀 손을 풀었다 꼬았다, 발을 동동 구르며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온갖 호들갑을 다 떨었다. 조금 전, 이경순과 신경전만 벌이지 않았어도 (긴급 상황 구조 요청) 눈빛을 날릴 수 있었을 텐데.
‘야! 이경순! 뭐 해? 투입! 투입!’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려던 그때였다.
“어머님 이쪽으로 좀 앉으세요.”
인생의 쓴맛을 아는 경순이가 노인의 어깨를 다정히 감싸 안고, 난로 앞으로 조심스레 이끌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은 ‘내가 주책이지.’ 같은 말을 되뇌며, 안경을 벗어 눈물을 훔쳤다. 경순이는 노인을 자리에 앉힌 뒤, 맞은편 의자를 끌어와 조용히 앉았다. 노인은 그간 북받치는 것이 많았는지, 거칠게 흐느꼈고 경순이는 묵묵히 곁을 지키며 기다려주었다. 가끔씩 노인의 손에 조심스레 휴지를 쥐어주느라, 책방 안에는 휴지 상자에서 휴지가 뽑히는 소리만 가늘게 들릴 뿐, 온통 고요했다. 어쩔 줄 몰라 카운터에 몸을 기대고 창밖을 바라보다가, 난로 앞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을 힐끔거렸다. 함박눈은 그칠 줄을 모르고 아이주먹만한 몸집으로 지상을 덮고 있었다.
“할머니는 꼭 밤에 저를 재워놓고 우셨어요. 눈물 삼키는 소리가 참 애처로웠는데. 제 나이 열두 살에 돌아가셨어요. 일하다가 다치셨는데, 병원 갈 돈이 없어서 파스만 바르고 주무셨어요. 밤새 끙끙 앓는 소리가 났는데. 또 몰래 우는 줄 알고, 모른 척 잠을 청했죠. 아침에 일어나니까, 일그러진 얼굴에 땀으로 범벅이 된 할머니가 깨지를 않았어요. 사람 얼굴이 저토록 구겨질 수가 있구나. 저는 울지도 못했어요. 징그럽고 무서운 감정이, 슬픈 마음보다 앞서 있어서요.”
그런 경순이가 안쓰럽다는 듯, 노인은 앞으로 몸을 빼면서 의자 끝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경순이의 손을 잡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숨기고 싶었던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았다.
“손녀 태어나고 다섯 살까지 키웠어요. 아들내외가 맞벌이라서요. 사람들은 손녀 보는 게 힘들지 않느냐 측은하게 봤지만, 마냥 좋았어요. 동화책 읽어주면 무릎에 앉아 눈을 반짝이는 게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아들내외가 손녀를 데리고 캐나다로 떠나요. 언제 돌아올지는 모른 다네요. 같이 가자 할 줄 알았는데, 그럼 못 이긴 척 따라가려고 했는데. 나도 같이 데려가라는 소리는 입에서 떨어지지를 않고. 가을이 없이 살아갈 자신은 없고. 모든 것이 엄두가 나질 않네요. 모든 날들이 초침하나까지 손녀에게 맞춰져 있는데, 이젠 홀로 시간을 어찌 보내야 할지 모르겠어요.”
경순이는 손 하나를 조심스레 빼내어 어르신의 손등 위에 살포시 얹었다. 경순이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고, 노인은 토해내듯 울었다. 그럼 신파를 싫어하는 나는? 울컥울컥 터질 것 같은 목젖을 손으로 움켜쥐며 창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느새, 느린 눈발은 잦아들고 있었다. 내일이면 해가 뜨고 알맞은 온도에 빛이 내려 얼어붙은 것들이 거리에 쌓이지 않도록, 구름 위로 데려갈 것 같았다. 슬픈 하모니도 옅어지기 시작했고,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나는 센스 있게 포트기에 버튼을 눌러 물을 끓였다. 보이차를 우려내 머그컵에 따라 노인에게 건넸다.
“아이고 죄송해요. 이게 무슨 민폐인지.”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르신을 향해 수줍은 미소 한 방 날리고 어색한 종종걸음으로 카운터로 몸을 숨겼다. 지켜보던 경순이가 빙긋 웃는 게 보여서 두 볼이 발그레해졌다. 괜스레 쑥스러워 뒤통수를 긁적이면서 장부를 뒤적였다. 볼 것 도 없는데 말이다.
“어머님! 손녀 생각날 때마다 헌책방으로 오실래요?”
뭐라고? 또 지 맘대로? 고개를 퍼뜩 들어 마뜩찮은 눈으로 이경순을 쏘아보는데. 막막해하던 노인이 활짝 웃으며 상실감을 털어내듯 기뻐했다. 그 모습에 나는 눈알에 독기를 빼고 시든 꽃처럼 장부에 코를 박았다.
'틈을 주면 안 돼! 틈을!'
속엣 말을 하면서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어? 나비 왔네?”
얼마 전 새롭게 군식구가 된 치즈 고양이가 테크 앞에 놓인 철제 의자에 몸을 비비고 있었다. 그걸 발견한 경순이는 냉큼 카운터 밑으로 몸을 숙여 플라스틱 그릇에 사료를 담아 밖으로 나갔다. 한강변 자전거 도로 한 복판에 겁도 없이 앉아 있는 녀석에게 통조림 한번 사 줬더니, 집까지 따라왔다.
“에구 추운 날 쟤들은 집 없어 힘들겠네.”
노인이 문 앞으로 다가서며 사료를 먹는 나비를 구경했다.
“경순이가 꽤 튼튼하게 집을 만들어줬어요.”
“어머 그래요? 젊은 사람들이 맘씨가 좋네요.”
책방까지 나를 따라 온 나비를 키우자고 난리 브루스를 춘 이경순 때문에, 어쩔 수없이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밑에 고양이 거처를 마련 해주었다. 경순이는 과일 가게에서 나무 상자를 얻어 와서, 그 안에 스티로폼 박스를 넣어 폭신한 이불을 깔았다. 박스 위에는 도톰한 천으로 커튼을 만들어 근사한 나비의 겨울 집을 만들어 내었다.
“녀석이 꽤 영리해서, 낮 동안은 어디서 실컷 쏘다니다 밤이 되면 돌아와요.”
“현조 영혼이 선해서, 나비가 쫓아왔어요,”
뭐, 나비 녀석이 쥐 같은 것만 주워오지 않는다면, 군식구로 받아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저 고양이가 계단 밑이 자신의 집임을 인지한 후부터 고수부지에서 사냥한 생쥐나 뱀을 물어다 책방 앞에 놓아둔다.
“경순아, 나비한테 말 했어? 한 번 더, 그딴 거 물어다 놓으면, 진짜 쫓아낸다고!”
“응 잘 말했어. 이젠 안한데. 나비야 안 그럴 거지? 현조 언니는 뱀도 안 먹고, 쥐도 안 먹어. 너 그러다가 진짜 쫓겨난단 말이야.”
“자꾸 징그러운 걸 물어다 놓니? 반짝이는 걸 물어 올 것이지!”
옆에서 가만히 서 있던 노인이 입으로 손을 가리며, 풋 웃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정말 큰 일 하셨어요. 생명을 거둔 다는 게, 어찌나 귀하고 그만큼 어려운 일인지, 잘 알아요.”
걸음걸이가 이상했던 나비는 임신을 한 상태였고. 임신하기 전에는 암컷이니, 생리를 했었을 거고. 그 힘든 걸 하는 채로 추운 길을 헤맨다기에. 저 추운 거리를 피를 흘리며 아프게 떠돌 생각을 하니까. 다시 거리로 내 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저 노랗고 고독한 생명에게 누울 자리 하나는 내어주고 싶었다.
“나비 쟤는 왜 자전거 쌩쌩 지나가는 길 한 복판에 누워 있던 건지 모르겠어요.”
“사장님 눈에 띄고 싶었나보네... 위험한데 있으면 분명 도와줄 거라 믿었나보네요.”
그런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층 계단 밑에 제 집으로 들어가는 나비를 건너다보는데, 경순이가 방정맞은 음성으로 노인의 팔을 잡아끌었다.
“할머니! 곧 저녁장사 시작하거든요, 밀면 한 그릇 들고 가세요. 면 금방 빼서 따뜻하게 말아드릴게요.”
기어코 노인을 밀면 가게로 데려가는 이경순과 뿌연 하늘을 번갈아 바라보며 여름 날 소나기를 그리워했다.
“비나 좀 내렸으면......”
*
다음날, 경순이가 차려놓은 늦은 아침을 먹고. 포기가 안 되는 글을 쓰고 싶어서. 고장 난 변기처럼 꽉 막힌 영감을 짜내보다가, 재방하는 드라마 몇 편을 연달아 시청하고는, 오후 한 시쯤 1층으로 내려갔다. 밀면 가게 안은 손님들로 보짝보짝하고, 경순이의 방정맞은 웃음소리도 들린다. 문이 열려 있는 책방 쪽으로 까치발을 들었더니, 만화책 코너에서 밀면 그릇을 들고 구경하는 남자가 보였다. 내가 밀면 가게에 자리를 내준 건, 단지 호의 때문만은 아니었다. 밀면 먹다가 책이 먹고 싶어지는 손님, 단 한 사람이라도 잡아보려는 심산이었다.
[책 구경 가능, 사실 분은 전화 주세요.]
이런 문구가 적힌 미니 칠판을 카운터 위에 올려 두었는데, 아직 연락은 없다. 이번 달도 헌책방은 적자다. 뭐 그래도 경순이 밀면 가게 덕에 돈 걱정은 안 해도 되니까, 마음은 편하다. 식당 안을 한번 건너다보고는, 한강으로 통하는 현대 아파트 정문으로 들어갔다. 고수부지로 내려오니, 햇볕은 짱짱한데 눈은 녹지 않았다. 다만 어떤 부지런한 이가 눈을 한쪽 구석으로 몰아 야트막한 얼음동산을 만들어 놓았다. 누군가가 미끄러워 넘어지지 않도록 바닥에 빗질한 자국이 보였다. 드문드문 세워진 눈사람을 구경하는데. 난데없이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어린 시절의 부모님이 떠올랐다. 단 한 번도 쉰 적이 없던 엄마아빠가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미더덕을 잔뜩 넣은 된장찌개를 바글바글 끓여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에 행복하고 안전한 마음이 다리를 건너다 왜 생각이 났는지 모를 일이다. 다만, 주어진 생을 버텨낼 용기는 따뜻한 추억으로 생겨나는 건가? 다음날이면 화수분처럼 자라난 힘은 어릴 적 행복했던 기억 한 조각이 만들어낸 건가? 책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뜬금없이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돌아갈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누군가 있다는 건, 그저 평범하게 누릴 당연한 일상은 아닐 거라는 생각도 왜 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떠오르는 건 참 많은데 그 생각들과 감정들을 잘 모르겠는 때가 알 때보다 많다. 왜 나는 잘 모르는 걸까? 마치 글을 쓰고 싶어 미치겠는데. 할 말도 참 많은데. 종이 위에 점점만 찍고 있는 답답함이랄까? 아 정말 모를 일이다. 입을 반쯤 벌려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고 숨을 멈췄다. 가슴이 풍선처럼 팽창하다가 금세 바람 빠져 쪼그라든다.
“엄마 된장국 먹고 싶다.”
허기진 배를 두드리며 강변북로 위에 드리워진 구름다리를 건너는데, 맞은편에서 나비가 걸어오고 있었다.
“나비!”
다리 위에서 치즈 고양이와 나는 동시에 얼음이 되었다가, 또 동시에 ‘땡!’ 하며 서로에게 다가섰다.
“니야옹~”
나비가 눈을 반짝이며 다가와 머리를 내 손등에 비빈다.
“외출하는 거야? 밖에서 만나니까 진짜 반갑다?”
엉덩이를 툭툭 두드리자, 갸르릉, 거린다. 어느 정도 반가운 인사를 마친 나비는 쿨하게 돌아선다. 엉덩이를 살랑 살랑 흔들 때마다, 목에 걸린 이름표가 반짝거렸다.
“자전거 잘 피해 다니고! 일찍 들어와! 뱀 보면 도망가고! 생쥐 봐도 그냥 피해! 너 이젠 고급 사료 먹잖아! 통조림도 연어만 먹잖아! 너도 안 먹는 쥐를, 왜 나한테 먹으라는 거냐?”
나비 녀석, 그래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한번 쳐다봐 준 뒤, 숲 풀 속으로 폴짝 몸을 던진다.
“몸 좀 사려! 새끼 베 놓고는. 경순이나 너나, 어째 몸을 안 사리냐?”
숲 풀에서 나와 공원 쪽으로 걸어가는 나비를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그러다 보니 저 멀리 나의 헌책방이 보이고, 그 옆으로 경순이의 밀면 가게가 눈에 들어온다. 식당 유리창과 책방까지 뿌옇게 김이 서렸다. 밀면 가게 때문에 책방 유리창까지 저 모양이다. 책방에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유리창에 저렇게 습기가 차는 일은 없는데 말이다. 밀면 손님들이 단체로 김을 내뿜나? 뭐, 그렇다고 딱히 싫은 건 아니다. 빗방울처럼 흘러내리는 모습이 가끔은 예뻐 보이기도 하니까. 그러다 문득, 그날이 떠올랐다. 처음 들어간 회사에서 직장 동료들이랑 밥 먹는 게 어려워서, 허 여사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화장실에서 몰래 숨어 먹었던 기억. 그런 자신이 스스로도 싫었다. 퇴근하고 헛헛하게 집에 돌아오는데, 저 멀리 반짝 반짝 빛이 나던 부모님의 가게. 입구에 친 비닐 문에는 뿌옇게 김이 서려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는데, 난파된 배에서 떨어져 망망대해를 떠돌다가 발견한 등대 같았다. 경순이의 밀면 가게와 그 옆에 나의 헌책방을 보는데, 난데없이 그날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날 느낀 포근함과 안전함까지.
“나 왔어.”
유리문을 열고 식당 안으로 발을 내딛는다. 오래된 나무 바닥이 유난히 삐걱거린다. 문득 깨닫는다. 책방으로 먼저 들어가야지, 왜 밀면 가게로 들어온 거지? 손님 하나 없는 외로운 내 헌책방에게 괜스레 미안해진다. 몸을 돌려 나가려는 찰나, 이경순이 나를 붙든다.
“점심 장사 끝났어. 밥 먹자, 냉이 된장국 끓였어.”
“된장국?”
향긋한 냉이 냄새. 입 안에 침이 고인다.
“냉이가 나왔어? 언제 끓였데?”
“집 된장으로 바글바글 끓였더니, 진짜 맛있다.”
경순이의 밀면 가게는 새벽부터 문을 연다. 그때마다 책방 문도 함께 열어둔다. 책방에 손님이 들어서면 종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가 울리면 대신 손님을 받아주겠다고 경순이가 말했다. 나는 식당일도 힘들 텐데, 하지 마. 같은 겉치레 인사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책방엔 하루에 손님 한 명, 올까 말까니까.
“혼자 손님 치르는 거 힘들지 않아?”
“전혀! 행복하기만 한 걸? 한걸음 걸을 때 마다 감사합니다, 하는 걸?”
사실 배부른 경순이가 밀면 가게에서 혼자 장사하는 게 힘들어 보여서 도와준 적이 있다. 그런데 불과 하루 만에, 이층으로 올라가라는 말을 들었다. 이유는 오이를 어슷하게 썰으라는 말을 잘못 알아듣고 다져버렸고, 얇고 넓적하게 썰어야 할 삶은 양지를 너덜너덜 걸레처럼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손님이라도 잘 받으려고 했는데, 나는 계산에 약했다. 계산기를 두드리는 동안 경순이가 먼저 손님에게 거스름돈을 주고 있었다. 점심 장사가 끝나고 경순이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냥 올라가서 쉬어. 나는 혼자 하는 게 더 편해.”
자존심은 상하는데, 큰소리치면 진짜 미친년 인증이라, 그냥 조용히 이층으로 올라갔고, 다시는 장사 도와준다는 말은 안하고 있다.
“집 된장, 가을이 할머니가 주고 가셨어.”
“누구?”
“어제 동화책 할머니. 손녀 이름이 가을이래.”
“아 참, 책값 드렸어? 부득부득 안 받으셔서.”
“안 받는 게 좋을 듯해. 돈 받으면 손녀를 파는 것 같으신가 봐.”
“그게 무슨 책은 책이지.”
“자식 보내는 부모 마음이 그런 거지 뭐.”
“보낸 자식 있어? 아직 뱃속에 들었으면서 누가 보면 자식 여럿이랑 이별 좀 겪은 줄 알겠네? 너 가끔 되게 많은 걸, 아는 것처럼 구는 거 맘에 안 들어!”
수저에 냉이를 가득 올려 입에 넣으며 쏘아붙였다. 경순이는 아득한 눈으로 먼발치를 바라보다가, 이내 함초롬한 낯빛으로 돌아보았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벙긋거렸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 뭐야? 왜 말을 하려다 마냐? 평소는 하지 말라도 하면서.”
이경순이 씁쓸하게 웃는다. 문득 떠오르는 내 생각처럼, 짐작할 수 없는 저 얼굴. 텅 빈 듯 꽉 차있는 눈동자. 보통인 것처럼 툭툭 던지는 굴곡진 그녀의 과거들. 대략 짐작은 하지만 또 기겁할만한 뭔가가 있는 건가? 자꾸 추측하게 만드는 비밀스러움이 숨어있나? 혹시 그런 게 있다면 그냥 비밀로 남겨두면 좋겠다. 아무 내색 없이 있다가 기다리던 애 아빠를 만나 무난하게 가줬으면 싶다. 어느 날, 걸음마하는 아이를 데리고 아주 가끔만 들러줬으면 싶다. 머릿속 광활하게 쳐있는 거미줄에 주렁주렁 매달린 상념들을 톡톡 건드리고 있을 때, 카운터 위에 못 보던 물건이 노란 속살을 뽐내며 빛나고 있었다. 아....... 익숙한 정경. 눈살이 찌푸려진다. 미간이 초승달처럼 좁아진다.
“저건 뭐야?”
“유리병 레몬 사탕!”
“나 레몬사탕 안 먹고! 싫어하거든? 그 끔찍한 마녀 생각 안 나? 나는 열두 살 이후로는 레몬 맛 사탕은 입에도 안대고, 헌옷은 명품이어도 안 입어!”
“우리 어릴 때 유리병 깨뜨리기로 한 거 기억해?”
“그래서 지금 저걸 깨자고?”
“담임의 레몬사탕은 특별한 아이들만 받았잖아. 여기서는 아무나 다 받을 수 있어.”
“그거랑 유리병 깨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나는 저걸 보는 걸로도 그 여자, 생각나서 싫다고!”
“누구나 레몬사탕을 먹을 수 있는 건! 우리 식으로 유리병을 깨트리는 거야!”
“참 가지가지 한다!”
“가지 있는데, 구워줄까? 양념간장 맛있게 만들어서?”
“야! 장난해? 당장 치워!”
“책방에도 갖다 놨는데.”
“뭐? 뭐를? 저거를?”
내 앞에 앉으면서 태연하게 얼굴을 끄덕이는 이경순, 갈수록 뻔뻔해진다.
“미쳤어? 책방을 동네 사랑방으로 만들어? 확성기삼총사 매일 공짜 커피 처먹으러 온다고! 그런데 이젠 사탕 까지? 거기다 레몬 맛? 아주 나를 고문을 하는 구나? 그 담임 년 때문에 얼마나 트라우마를 겪으며 살았는데!”
“현조야. 유리병 레몬사탕을 슬픈 기억으로 남겨놓지 말자. 왠지 5학년 교실에 있는 유리병에 갇혀진 느낌이잖아. 우리의 희망과 슬픔을 새로운 유리병에 담아보자. 켜켜이 쌓여 노랗고 아름답게 빛날 때까지.”
“어쭈구리....”
요즘 시 좀 읽더니, 시를 쓰고 앉았다, 그래, 누굴 탓하겠나... 이경순에게 시집을 선물하는 게 아니었어! 내 발등 내가 찍었네! 씩씩대면서, 트집 잡을 거리를 떠올려 본다.
“책방에 있는 커피 네 식당으로 옮겨! 사탕도!”
이경순 뻔뻔하게 고개를 쳐들며,
“너 꿈이었다며? 뿌리서점 사장님처럼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믹스커피 건네려고 헌책방 한 거라며.”
“야! 그 그건.”
“손님들한테 헌책방 가면 커피 있다고 하는데? 그럼 밀면 손님이 곧 책 손님 되는 거지 뭐.”
열은 받는데, 뇌는 마비돼서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오늘따라 말을 너무 잘 하는 이경순. 진짜 얄미워 죽겠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를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충동이 밀려온다.
“손님 한 분은 저녁에 동화전집 사러 오신다는데?”
“그러든지, 말든지!”
“현조, 오늘 날씨 엄청 좋지?”
“비나 쫙쫙 퍼 불 것이지! 왜 해는 비추고 지랄이야!”